선택진료비의 허상
환자의 의향을 존중합니다?
대형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먼저 접수 시 결정할 사항이 있다. 전문의를 딴 지 10년이 지난 의사에게 받는 선택진료와 그 외 의사에게 받는 일반진료,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단 선택진료는 일반진료에 비해 2배 가량 비싸고, 추가 진료비도 환자가 전액 부담해야 한다. 대형 병원 이용자들의 생각을 들어 봤다.
S 씨 대형 병원 환자 보호자 曰 아무래도 선택진료가 좀 더 낫지 않겠나. 어느 쪽을 원하냐고 물으면, 선택진료를 택할 것 같다.
T 씨 대형 병원 환자 보호자 曰 특진(선택진료)이 좀 더 전문적일 것 같고, 또 더 잘 봐줄 것 같으니까 그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건 사실이다.
U 씨 대형 병원 이용자 曰 돈보다는 건강이 중요하니까 비용이 더 들더라도 나라면 선택진료를 택하겠다.
흔히 특진이라 불리는 선택진료는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상급 종합병원에만 있는 진료 제도다. 환자에게 직접 의사 선택권을 준다는 것이 정부에서 밝히는 선택진료의 도입 취지인데, 언뜻 보면 환자들을 위한 참 좋은 제도 같아 보이는 이 선택진료 때문에 실제론 고통 받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국민이 직접 부담하는 선택진료비 2조 원 시대를 맞아 선택진료에 숨겨진 심각한 문제점을 밝힌다.
골수 검사만큼 고통스러운 선택진료비
마스크를 쓴 V 씨가 알아서 환자복을 챙기더니, 옷을 갈아입고 구석의 한 침대에서 제집처럼 익숙하게 잠을 청한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 그는 암 상태 진단을 위한 골수 검사를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
V씨의 병은 혈액암의 일종인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반드시 대형 병원의 선택진료 의사만 볼 수 있는 중증 질환이다. 이날도 혈액내과, 소화기내과, 감염내과 세 군데에서 선택진료를 받고, 퇴원 시 약 57만 원의 진료비를 납부했다. 진료 때마다 붙는 엄청난 선택진료비 역시 골수 검사의 고통만큼이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 선택진료는 생존을 위한 필수 진료인데, 진료비는 선택 명목으로 네 번 붙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지난해 골수이식 수술을 받을 때에도 V 씨가 부담한 금액은 약 1,800만 원이었고, 이 중 입원비를 제외한 선택진료비는 약 440만 원이었다.
V 씨 혈액함 환자 曰 처음에 병원 영수증을 보고, 내가 여기 병원 원장님이랑 아는 사이라면 정말 붙잡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제발 선택진료비만 빼달라고. 병원비가 부담돼서 죽는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믿는 사람 없다. 나처럼 암에 걸려 고생해 본 사람들은 알아도 다른 사람들은 정말 모른다.
암이 발병하기 전 견인차 기사였던 V 씨는 아내와 세 아이를 키우며 넉넉하진 않지만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나 암으로 일을 못하게 된 데다, 선택진료비와 입원비 등 엄청난 병원비까지 지출하면서 금새 빚더미에 올랐다. 결국 V 씨 부부는 암 선고 1년 만에 개인 파산했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했다.
딱히 특별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W 씨의 아침은 딸을 챙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엄마가 챙겨주지 않으면 사실상 일상적인 활동조차 하지 못한다. 심하면 죽음에 이르는 결절성경화증(피부나 뇌 등에 결절, 즉 작은 혹이 발생하는 질환)이란 중증 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과 뇌에 작은 혹이 많이 생기면서 지적장애를 동반하는 것이 그 주요 증상이다. 생후 9개월 때부터 벌써 12년째 딸은 병마와 싸우고 있다. 대형 병원에서 선택진료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딸의 병원비, 특히 선택진료비 탓에 엄마는 오늘도 가슴이 아프다.
W 씨 결결정경화증 환자 보호자 曰 병원에 갈 때마다 이번엔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까 노심초사다. 늘 그 걱정을 안고 산다. 이 특진비가 뭘까, 특별하게 진료한 거 없는 거 같은데, 특진비가 왜, 어떻게 책정된 건지 정말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병원 가서 따져 물을 순 없으니까 그냥 내라는 대로 낸다.
현재 W 씨네 가족의 수입은 그녀가 미용사로 일해 버는 돈 월 100만 원이 전부다. 딸의 병원비로 이미 수억 원의 빚을 지고 개인 파산한 데다, 최근엔 그나마도 병원비를 구하지 못해 딸의 치료를 잠정적으로 포기한 상태다.
이진석 의료관리학자 曰 이들이 한 해 동안 부담하는 본인부담금만도 2조 원 가량 되는데, 본인부담금의 40%를 선택진료비가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 선택진료비를 해결해 주지 않는 것은 결국 국가가 4대 중증 질환과 같은 환자들을 빈곤층으로 내모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희귀병을 비롯해 암, 심장병, 뇌혈관 질환과 같은 이른바 4대 중증 질환을 앓고 있어 선택진료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은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 4대 중증 질환자들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진료비용을 감당하다 상당수가 메디컬푸어, 즉 의료빈곤층으로 내몰리고 있다. 의료빈곤이 계속되면서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치료마저 포기한다.
선택진료비의 실체
존중? 고통이나 주지 말지
선택진료는 사실 환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병원과 의사들의 수익보장을 위해 시작됐다. 선택진료의 기원은 반세기 전인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립병원 의료진의 임금이 민간병원보다 훨씬 적다며 정부가 국립병원에 한해서 진료비를 더 받을 수 있는 일종의 특혜인 특진비를 도입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민간병원까지 확산된 것이다. 1977년 건강보험 도입 이후 정부는 상급 의료기관인 대형 병원에 의료수가를 일반 병의원보다 30% 올려주었지만, 여전히 편법인 특진비도 명칭을 선택진료비로 바꿔 계속 받을 수 있게 허용해 주었다.
김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 교수 曰 3차 진료기관, 상급 종합병원에 대해서 이미 건강보험공단에서 그 아래 병의원에 비해 추가적으로 진료비를 보상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3차 기관을 이용할 때 선택진료비라고 하는 추가 비용을 또 부담하게 하는 것은 같은 서비스에 대해서 이중으로 보상을 하는 제도적 모순이다.
선택할 수 없는 선택권
중요한 건, 환자들에게 준다는 의사 선택권도 실제로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서울 대형 병원의 선택진료 의사 비율을 살펴봤다.
서울대병원은 선택진료 자격을 갖춘 392명 가운데 79.3%인 311명이 선택진료 의사로 지정됐고, 세브란스병원과 서울아산병원 등 서울의 대형 병원 대부분은 선택진료 의사 비율이 80%에 육박했다. 이렇게 선택진료에 관한 선택권이 사실상 환자들에게 거의 없는 불합리한 상황은 정부도 인정하지만,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현재까지 선택진료에 관한 정확한 현황 파악도 되고 있지 않은 만큼, 정부는 올 상반기까지 대대적인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개선안을 모색한다는 계획이다.
이창준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장 曰 난이도가 아주 높은 질환의 경우 특정한 의사에게 진료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해결해야 할 때라는 것을 정부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더 많은 비용을 지원하려면 전체적으로 보험료가 인상되는 측면을 감안해야 하기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통한 다각적 해결 방안을 모색 중이다.
비용은 + 효과는 0
현재 대형 병원의 진료 시스템은 비싼 선택진료비를 낸 환자들의 기대와도 맞지 않는다고 한다.
X 씨 대형 병원 의사 曰 사실 선택진료비가 붙는다고 해서 의사가 환자를 더 열심히 본다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성과급이 더 나오겠구나 생각하는 수준이다. 선택진료 의사가 아닌 경우에도 대부분, 환자들이 3차 병원에 오지 못하게 하는, 혹은 경증 환자들이 중증 환자 진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차단막 정도로 여길 뿐이다.
수술을 받을 때 선택진료를 했다고 해서 선택진료 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술을 집도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한다.
Y 씨 대형 병원 의사 曰 환자들은 아마 특진이라고 하면 칼이 닿는 순간부터 의사가 하겠거니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굉장한 VIP 환자이거나 교수님이 시간이 정말 많이 남는다면 모를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야말로 환자의 운이다.
한 의사는 아주 중한 병이 아니라면 굳이 선택진료를 택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Z 씨 대형 병원 의사 曰 선택진료 교수 앞으로 입원한 경우와 비 선택진료 교수 앞으로 입원한 경우 실제로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 거라고 보나. 분명 전자의 경우 선택진료비가 추가로 들어가지만, 그 비용을 추가로 부담할 만큼의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의사와 환자가 선택진료에 관해 전혀 다른 기대를 갖고 있는 현실이 선택진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말한다.
김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료관리학 교수 曰 선택진료비 제도는 국민 입장에서는 추가적인 진료비를 부담하고라도 더 나은 질의 의료서비스를 기대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병원과 의사는 저수가, 건강보험의 낮은 수가에서 의료기관이 운영될 수 있도록 수익을 보전하는 일종의 탈출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국민의 기대와 병원•의사의 생각이 서로 다른 간극이 굉장히 큰 동상이몽을 사회적으로 만들어 내는 제도이다. 정부가 조속히 선택진료비 제도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에 나서지 않는다면, 의사와 환자의 불신이 깊어지고 결국 그 불신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의료체계를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개인파산하며 의사에게 얹어주는 보너스
선택진료비 관련 제보 가운데, 몇몇 대형 병원에서 선택진료비 수익을 의사들 성과급에 과도하게 반영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심지어 공공의료기관의 본보기가 돼야 할 국립대 병원 가운데 일부에서도 선택진료비가 많을수록 성과급도 올라가는 경쟁 시스템을 만들어 과잉진료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A 씨 국립대병원 의사 曰 인센티브 때문에 수술을 엄청 많이 한다. 상급 병원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B대병원 외과의 C 교수는 하루에 수술을 10개나 한다더라.
대형 국립대 병원의 성과급 현황을 입수했다. 총 13곳의 국립대 병원 가운데 10곳이 선택진료비 수익에서 성과급 전액을 지급하고 있었다. 국립대병원 가운데 가장 선택진료비 수익이 많은 서울대병원의 성과급 자료를 입수해 비교해 봤다. 성과급 책정 기준에서 진료수익 실적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 비싼 진료를 많이 해야만 성과급이 올라가는 체계다.
서울대병원에서 성과급이 가장 높은 진료과는 CT, MRI 등 비싼 영상촬영이 많은 영상의학과로, 의사 1인당 평균 9,400만 원에 달했다. 수술과 처치 등 선택진료가 많은 외과의 성과급은 의사 1인당 평균 7,600만 원에 달했고, 비싼 진료와 검사가 많은 내과의 성과급도 의사 1인당 7,400만 원이었다. 유일하게 선택진료를 할 수 없는 응급의학과는 성과급이 4,500만 원에 그쳤다. 결국 비선택진료과인 응급의학과와 비교해 보면 비싼 선택진료가 가능한 영상의학과는 성과급이 2.1배나 많았고, 수술과 처치 등 역시 비싼 진료가 집중되는 외과도 응급의학과에 비해 1.7배나 많은 것이다.
유기홍 교육위원회 국회의원 曰 선택진료비에서 의사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성과급을 받기 위해 더 많은 환자를 봐야 하고, MRI나 CT 같은 더 많은 검사와 수술을 하게 되는 과잉 진료를 낳게 된다.
서울대병원의 한 의사는 국립대병원 교직원으로서, 연구 및 진료 업적보다 돈 되는 진료 실적에 더 좌우되는 성과급 체계에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고 털어놨다.
D 씨 서울대병원 의사 曰 10년 이상 이런 시스템이 계속 강화, 유지된다면 국립대 교수 본연의 역할인 교육이나 연구를 등한시하게 된다는 문제점 때문에, 지금 내부에서도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결절성경화증을 앓고 있는 W 씨 딸의 꿈은 뮤지컬배우다. 수업시간에 노래만 나와도 몸을 흔들 만큼 음악을 좋아한다. 하지만 선택진료라는 이름 하에 두 배 가까이 비싼 진료비 부담으로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데,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 선택 없는 선택진료 | 2013-04-23 | 현장21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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