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에는 봄바람, 서민에는 겨울바람
하늘엔 영광
국내총생산 세계 15위, 세계 무역 8위, 신용등급 안정적, 그리고 세계 500대 안에 드는 기업 13개. 우리는 이렇게 번듯한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 경제는 잘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15년 간 중산층은? 10% 이상 감소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불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서민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땅에는 봉변
H 씨 50세, 남성, 치킨집 운영 曰 장사가 안된다. 별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다른 할 만한 것도 없고 하니까, 그냥 세 내고 빚 안 지는 수준이나마 울며 겨자 먹기로 붙잡고 있다.
자영업자들에게는 더 이상 빛이 보이지 않는다. 두 집 가운데 한 집은 온 가족이 달려들어 한 달 꼬박 일해도 100만 원 벌기조차 힘들다. 적자 영업을 하다 3년 후엔 문 닫기가 일쑤다. 자영업자의 위기는 곧 중산층의 위기다. 우리 경제의 버팀목,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김일광 팀장 KB 금융지주 경영분석팀 曰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개인 사업자들의 평균 생존 기간은 3.4년 수준이다. 최근 창업한 자영업자일수록 생존 기간이 줄어드는 걸로 보아, 우리나라 자영업자 시장 내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고 할 수 있다.
낙수효과 기대
이명박 전 대통령, 曰 장사가 안되도 너무 안된다. 해서, 우리 중소 상인들 좀 잘되게 해보려고 내가 대통령 되려는 거다. 큰 회사 잘되라고 하겠나? 부자 잘되라고 하겠나? 그분들은 가만둬도 다 잘한다. (2007년 대통령 후보 유세 중)
내가 친 기업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기업이 잘돼야 국가가 잘된다는 원칙에 한 치의 이견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새 정부는 '비즈니스 프랜들리'한 정부를 만들 거다. (대통령 당선인 초청 경제인 간담회, 2007-12-28)
지난 2007년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한 기업가 출신 대통령 후보에게 국민들은 기꺼이 표를 던졌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준은 먼저 기업이 잘돼야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이 잘살게 된다는 거였다. 이후 5년 간 수출 대기업은 급성장했다. 2012년 삼성전자는 29조, 2011년 현대자동차는 8조의 영업이익을 남겼다. 사상 최대 실적이었다. 정부의 친 기업 정책도 한몫했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曰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수출 비중이 커서, 당시 고환율 정책으로 굉장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대기업 관련 규제 철폐 또는 완화, 수도권 규제 완화, 세금 인하 등의 정책들 모두 큰 몫을 했다. 결정적으로 법인세 인하가 대기업의 이익을 크게 늘렸다. 정부는 이러한 대기업에 대한 정책적 혜택이 투자 확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거라 판단한 것이다.
정부는 기업이 돈을 벌면 투자를 늘려서 일자리를 만드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내다봤다. 이른바 낙수효과다. 빈 컵을 차곡이 쌓아 물을 부으면 넘치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과 서민의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낙수효과 무효
과연 정부의 예상대로, 늘어난 수출 대기업의 영업이익이 중소기업과 서민경제에 흘러들어 긍정적인 영향을 선사했을까? 일자리는 늘었을까?
삼성전자는 효자 상품인 휴대폰의 해외 생산 비중을 늘려 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휴대폰은 해외에서 생산된 양이 국내 생산량보다 5배나 많았다.
이순학 KB 투자증권 연구원 曰 애플도 현재 중국에서 대량생산을 하고 있다. 미국 공장은 전혀 없다. 이런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노동력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낮은 지역으로 생산 공장을 이전할 수밖에 없다.
지난 5년 간 현대자동차에는 11,000개 가량의 일자리가 생겼다. 하지만 그 일자리의 80%는 해외 일자리다. 기업이 성장한다고 해서 국내 일자리가 반드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曰 기업이 투자를 많이 하고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또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세금도 많이 내는 체제가 갖춰져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전혀 안되고 있다. 투자를 하더라도 외국에, 또는 자동화에 투자해 고용이 창출되지 않는다.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 曰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실적이 GDP의 75%를 차지한다. 수출실적이 올라가면 당연히 GDP는 올라간다. 즉, 경제도 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장이 재벌에만 해당되고 중소기업으로, 근로자에게로 돈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거다. 왜 내려오지 않느냐, 재벌이 중소기업들을 연명하는 수준까지만 묶어 둔 채 더 이상은 중소기업에게 이익의 몫을 주지 않고 나머지 몫을 대기업들이 다 가져가기 때문이다.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위 컵을 채우는 물은 컵을 더 키웠을 뿐 넘치지 않았다. 대기업의 영업 실적만 올렸을 뿐, 서민경제까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기업, 어떡하지?
기업만 크고 가계는 죽고
수출로 경제성장만 하면 모든 국민이 잘살게 된다는 건 옛날 얘기다. 대기업이 수출로 아무리 많은 이익을 올려도, 절대 그 혜택은 국민들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최근 한국산업연구원에서 기업과 가계소득을 분석했다. 외환위기까지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은 같은 속도로 증가했다. 하지만 지난 5년 간은 기업소득 증가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강두용 산업연구원 동향분석실장 曰 기업이 창출한 부가가치의 증가율만큼 가계가 얻는 임금소득 증가율도 나타나는 게 정상인데, 외환위기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기업이익에 비해 임금소득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거다.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가 기업의 이윤이 되는데, 기업이 임금을 줄이니까 이윤이 늘어나서 기업소득은 호조가 되고 가계소득은 부진해졌다.
기업과 가계의 소득격차는 최근 급격히 더 벌어지는 추세다. 미국, 일본과 비교해도 한국의 소득격차는 두 배 이상 벌어져 있다. 대기업에 유리한 조세 정책, 자영업의 장기 침체, 저임금 근로자의 증가가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기업소득이 높고 가계소득이 낮으면 내수 억제 효과가 나타난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내수증가율은 GDP 성장률에 비해 매우 낮다. 이 격차는 OECD 중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독식하는 대기업
국제노동기구 ILO는 최근, 국민총소득 가운데 기업의 소득이 늘고 개인의 소득이 줄면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지 분석했다. 이른바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연구조정관 曰 우리도 결과를 보고 놀랐다. 일단 노동소득분배율이 줄면 소비는 아주 급격하게 준다. 소득분배율이 1% 감소하면 소비가 적은 나라는 0.3%, 많은 나라는 0.5% 가량 줄어든다. 굉장히 큰 거다.
전체 소득 100을 기업과 노동자가 5:5로 나누면, 노동자 한 명에겐 10씩 돌아간다. 그러나 6:4로 분배율이 달라지면 한 명의 몫은 8로 줄어든다. 개인에게 분배되는 소득은 줄지만 집값, 사교육비 등 소비에 대한 부담은 점차 가중되고 있다. 개인은 지갑을 닫을 수밖에 없다.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하면 내수가 악화되는 이유다.
노동소득분배율이 떨어졌을 때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벌게 된 기업이 설비 투자를 늘리고 고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없을까?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연구조정관 曰 이윤이 높아져도 투자가 그렇게 늘지는 않더라. 심지어는 투자가 전혀 늘지 않은 나라도 있다. 미국, 한국이 이에 속한다. 전혀 변화가 없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소비가 줄었을 때 투자가 늘어야 경제성장이 가능한데, 소비는 줄었는데 투자가 늘지 않으니까 경제상황이 악화되는 것이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연구조정관 曰 미국이 취한 방식, 즉 가계 부채를 이용해서 유효수요를 지탱하는 방식은 일단 국내적으로도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이다. 한국이 추진한 수출에 의존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식은 일부 소수국가에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에 따른 문제는 어떤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되짚어 보고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빨리빨리 한국, 복지는 세월아 네월아
가계의 소비가 기업의 투자로 이어지는 성장 구조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적인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차기 경제의 슈퍼모델로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를 꼽았다. 이들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도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이우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曰 복지국가를 채택한 북유럽 국가들 역시 경제적 특성상 우리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수출 의존적이다. 결국 사회적 타협을 이룬 결과라고 생각한다. 초기에는 북유럽 국가들도 수출 의존적 경제에서 우리나라 70년 대와 같은 전략을 취했다. 수출이 아니면 먹고 살 것이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도 있었다. 다만, 수출에 의존하다 보면 국내 정책과 상관없는 대외적 요인에 의해 국내 경제가 심하게 흔들릴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해, 이를 완충시킬 만한 국내적 장치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것, 그 차이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로 실직자는 순식간에 3배로 늘어났다. 대량 해고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현재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曰 중산층에 속하는 웬만한 사무직 노동자나 생산직 노동자들도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완전히 황무지로 쫓겨나 일상생활조차 어려워진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우리가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다. 수출주도형 국가에서 잘 갖춰진 복지 시스템은 장기적,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 행복 국가의 조건 3부 중산층이 미래다 | 2013-02-17 | KBS스페셜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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