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도 강자 세상
영화 <도둑들>은 진짜 도둑들
영화감독 김기덕을 만났다.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하고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의 영화 인생은 험난했다. 17년 동안 영화 18편을 만들면서 매번 해야 했던 고민은 '과연 제대로 영화를 개봉이나 할 수 있을까'였다.
김기덕 영화감독 曰 영화 <빈 집> 이후에는 국내에서의 영화 개봉이, 메이저가 붙어서 수시로 광고비도 대고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개봉할 때마다 대형 영화와 싸워야 했던 그는 사실상 국내 개봉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2008년 <비몽> 이후에 만든 두 편의 영화는 실제로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았다. 4년 만에 <피에타>를 들고 대중 앞에 선 김기덕은 기자회견 중 이런 말을 꺼낸다.
김기덕 영화감독 曰 천만의 기록을 내기 위해서 여전히 안 빠져나가고 있더라. 난 그게 도둑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말 하는 나도 편친 않다. 그러나 돈이 다가 아니지 않나. 일 대 일로 싸워서 지면 당당히 받아들이겠지만 그게 아니잖나. 편법과 독점이 난무하는 이런 불공정한 상황은, 내가 아무리 착해도, 화나는 일이다. 이 정도만 하겠다.
터치 어려운 <터치>
* 영화 배급사 *
영화의 마케팅과 유통 담당
개봉일과 제공 형식(극장 상영, DVD, TV프로그램, 온라인 다운로드 등) 결정
제공사 및 수출 관련 계약, 저작권 관리
<터치>는 제작비 4억 가운데 상당액을 인천영상위원회의 제작지원기금으로 충당해 2011년 말에 완성된 영화다. 소규모의 팝엔터테인먼트사가 배급을 맡아 2012년 말부터 전국 98개 스크린에서의 상영을 확정 지었다는 소식에, 개봉을 앞둔 관계자들의 소감을 물었다.
김지영 영화배우 曰 규모나 홍보적인 측면이 작은 거지 영화 자체가 작은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로부터 누군가는 다이아몬드를 발견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놀라운 혜안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본다. 놓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기회와 가능성을 지닌 작품이다.
민병훈 영화감독 曰 좋은 작품이라면 분명히 알아 주는 관객이 있을 거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작품 완성 후 1년 만에 중소 배급업자를 찾았고, 현재 개봉을 앞두고 있다.
드디어 개봉일. 12개 스크린을 가진 복합 상영관에서 <터치>의 상영 일정을 확인했다. 개봉 당일에는 오전 11시에 단 한 번, 다른 날도 많은 날은 세 번, 적은 날은 한 번이 전부였다. 한 스크린에서 온전히 상영되지 못하고 다른 영화들에 섞여 틈틈이 상영되는 교차 상영, 이른바 '퐁당퐁당'이다. 이런 시간표로 상영되다 보니 관객수도 많지 않다.
R 씨 관객 曰 <터치>를 보려고 처음에 극장 홈페이지에서 상영 영화를 쭉 봤는데 <터치>가 없는 거다. 제목을 직접 입력해 검색했더니 그제서야 확인되더라.
다른 극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터치>는 관객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주일 만에 상영관 12개로 줄었고, 감독은 개봉 8일 만에 스스로 상영 종료를 선언했다. 감독 스스로 자기 영화를 종영시켜 버린, 이른바 영화적 자살행위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터치>는 막을 내렸다.
슈퍼갑의 아우라
갑과 을은 공정히 협의했을까?
영화진흥위원회는 2009년부터 불공정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감독은 부당한 교차 상영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영화진흥위원회 불공정거래 신고센터를 찾았지만, 극장 측은 여전히 배급사와 사전 협의된 내용임을 강조하고 나섰고, 영진위는 극장측에게 '교차 상영한 날짜 수의 2배 만큼 재상영하든지, 수익금 배분율을 높여 제작사에 지급하라'는 권고로 마무리했다.
민병훈 영화감독 曰 나는 돈으로 보상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다. 진심 어린 사과와 실토를 원했다. 배급사와 극장은 갑과 을의 관계다. 특히 '극장'은 '슈퍼갑'이다. 극장에서 상영 일정을 잡아 배급사한테 통보하면, 영세 배급업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걸 협의했다고 말하는 건, 사전 공지가 분명 있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건, 불공정한 처사다.
대형 영화의 시장 장악에도 불구하고, 지난 4년 간 영진위에 접수된 신고 건수는 총 8건, 1년에 겨우 1~2건이 전부다.
이용선 영화진흥위원회 연구원 曰 영화산업 종사자의 규모는 큰 편이 아니다. 신고센터에서 신고자를 보호한다고는 하지만, 신고 사실만 알려져도 누가 했는지 추측이 가능할 정도다. 때문에 향후 차기 작업에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을 갖기 마련이고, 그래서 대부분 신고를 꺼리는 분위기다.
2012년 7월, 한국영화 동반성장협의회가 출범했다. 정부와 영화계가 함께 실질적인 상생 모색의 일환으로 표준 상영 계약 권고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권고안일 뿐 안 지킨다고 처벌 받는 건 아니다. 영화 <터치> 논란 역시, 이런 권고안이 마련된 뒤에 일어난 일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曰 애꿎은 영화진흥위원회를 두고 논란이 제기되는데, 사실 영화계가 얘기해 봐야 먹히지도 않는다. 별 힘이 없기는 영진위도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정책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대기업은 분명 기여했다. 한국영화계에? 아니, 본인들 자산에!
박병우 문화체육관광부 영상콘텐츠산업과 과장 曰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면 분명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영화산업에 있어 대기업의 역할이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불공정 문제와 더불어,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영화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영화계의 절대 강자로 불리우는 Big Three는 CJ E&M과 롯데 엔터테인먼트, 오리온 쇼박스다. 1990년대 말 CJ의 진출을 필두로 대기업들의 영화산업 진출이 본격화됐다. 2006년 스크린쿼터제가 대폭 축소되고도 우리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대기업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자국 영화로 점유율 50%를 넘긴 곳은 인도와 중국, 일본과 우리나라뿐인데, 이는 대기업이 우리 영화를 더욱 산업화시킨 덕분이라는 것이다.
최건용 극동대학교 영상제작학과 교수 曰 영화를 만들고 희생했던 충무로 영화인들이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동화, 선진화에 있어 대기업의 기여도 역시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선진화, 대형화에 이바지한 사실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할 만하진 않다.
위 컵의 물이 차서 아래 컵으로 흘러내려
거대 자본의 투입 덕에 영화계 전반이 풍성해졌다면 분명 칭찬할 일이겠지만,
한국영화의 발전(?)으로 한국영화가 발전한 게 아니라 대기업만 커졌는데
대체 뭘 칭찬하라는 건가?
한국인이 한국영화를 많이 봤다는 얘기를 꺼내려거든 한 번 더 입 닫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한국인이 한국영화를 많이 보게 된 게 아니라,
한국인이 대기업 영화를 많이 보게 된 거니까.
납품을 허하소서
CJ E&M과 롯데 엔터테인먼트, 오리온 쇼박스가 영화계에 진출한 지 10여 년이 지난 작년 한 해, 빅3는 한국영화 매출액의 75%를 차지했다. 한국영화 관객 10명 중 7명이 3사의 투자배급 작품을 관람했고, 50여 개의 투자배급사 가운데 빅3 영화가 3/4에 달한다. 영화 권력이 집중된 요즘, 제작자와 감독은 대기업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고, 시나리오 작가는 돈 버는 수단으로 전락한 영화에 푸념을 토한다.
S 씨 영화제작자 曰 실제로 순서가 있다.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면 제일 처음 가는 곳이 씨제이, 그다음이 롯데, 그다음이 쇼박스, 그다음이 뉴, 보통 이런 순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曰 영화계가 일종의 숙주처럼 생각하고 끌어들였던 것이 대기업 자본이다. 그러나 파트너십을 형성하면서 서로 공생할 거라던 영화계의 기대와는 달리, 현재 자생적인 영화 자본이 생길 가능성은 제로가 돼 버렸다. 아주 열세에 놓인 하청기업처럼 대기업에서 하청을 주면 영화제작사에서 작품을 납품하는 형태로 굳어지고 있다.
T 씨 영화감독 曰 영화 기획 단계에서부터 대기업 투자자들을 의식하고, 눈치를 본다. 그들의 기호에 맞는 시나리오를 쓰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준비한다.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됐다는 게 참 무서운 일이다.
U 씨 시나리오 작가 曰 투자배급사들이 모니터링을 할 때, 이쯤에서 웃겨 주고 이쯤에서 반전을 일으켜야 된다는 식의 계량화된 나름의 흥행공식으로 작품에 점수를 매긴다. 계량화된 모델에 맞춰 시나리오를 뜯어고치기 일쑤다.
이보다 더 공정할 순 없다?
3대 투자배급사 가운데 두 곳은 계열사 소유의 극장, 즉 CGV와 롯데시네마를 가지고 있다. 투자와 제작, 배급과 상영까지 모두 아우른 이른바 수직 계열화다. 우리나라 극장 현황을 보면, 전체 2천여 개 가운데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가 858개, 590개, 408개로 총 1,856개, 즉 전체 극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윤충한 한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曰 수익적으로 통합함으로써 한 사업자가 모든 과정을 관장하게 되면,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고 불확실성도 해소할 수 있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 범위의 경제 측면에서 볼 때, 수직 계열화는 생산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식인 것이다.
피해의 입장을 들어 봤다. 자사 기획사끼리 소위 밀어주기를 한 탓에 공정한 경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V 씨 영화감독 曰 4년 준비 끝에 영화를 만들어 개봉 후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는데, 중간에 CJ 영화랑 붙으면서 퐁당퐁당으로 전락했다. 극장이 줄고 영화를 보여줄 기회를 잃으면서 흥행 스코어도 저조하게 끝나 버렸다.
W 씨 영화 홍보사 관계자 曰 개봉 당시 100개 관을 잡고 그중 85% 이상을 퐁당퐁당으로 시작했는데, 광해가 1,000개 관을 잡으면서 극장에서 싹 다 밀려났다. 그다음 주 광해가 개봉하는 날, 스크린이 10개도 안 남은 거다.
불공정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극장 측은 여전히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임성규 롯데시네마 홍보팀장 曰 관객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영화관이 틀고 더 좋은 영화를 투자배급사가 만드는 유기적인 체계일 뿐, 우리가 만드는 영화라고 우리가 걸고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박경수 CGV 홍보팀장 曰 일단 고객 반응이 최우선이다. 사전 예매율과 고객 평점을 토대로 마케팅을 책임지고 있는 배급사와 협의 하에 결정한다. 독단적인 결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사계열사 영화라고 해서 혜택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역차별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제출할 데 없는 '불공정 증거 자료'
과연 어느 쪽 말이 사실일까?
① CJ E&M
정지훈, 신세경 등 화려한 출연진으로도 주목 받았던 영화 <알투비>는 공군 특수비행팀을 소재로 한 제작비 100억 원 규모의 영화다. CJ E&M의 지난해 하반기 야심작이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결과는 관객 동원 수 120만. 그나마 100만을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계열사 CGV의 힘이 컸음을 알 수 있다. CGV를 제외한 60%의 극장이 <알투비>를 11,000여 번 상영할 동안 CGV는 그 두 배인 21,000여 번을 상영한 것이다.
CJ E&M의 대표적인 성공작, 작품성까지 인정 받은 천만 관객 영화 <광해>의 끝도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추석 연휴 당시 전국 스크린의 절반 가까이를 도배하면서 과점 논란을 일으킨 데 이어, 연말엔 고무줄 상영으로 또 한 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개봉한 지 석 달이 지나 다른 극장들 대부분이 광해를 내렸을 때도, 극장가의 대목이라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CGV는 홀로 수십 개의 스크린에 광해를 걸었다.
곽영진 영화평론가 曰 그동안 장사를 많이 해먹었으니까 좌석 점유율이 현저히 줄면 당연히 스크린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 그런데 기록 경신을 목적으로 많은 스크린 수에 긴 상영 기간까지 고수한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② 롯데 엔터테인먼트
롯데 엔터테인먼트가 투자배급한 가문의영광 5편도 마찬가지다. 개봉 4주 차에 접어든 지난 10일 스크린 수를 살펴봤다. 다른 극장을 다 합쳐도 스크린 수가 채 10개도 되지 않지만, 롯데시네마 홀로 80여 개나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추세는 일주일 가까이 계속됐다.
할리우드? 아직 멀었다
할리우드보다 70년은 뒤떨어진 한국 영화계. 할리우드는 전세계 영화의 80%를 점유한 미국 영화의 산지로, 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픽처스 등 유명 제작사들이 밀집해 있다. 이곳에서도 대형 영화사들의 과점 논란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 영화아카데미가 운영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향해, 1946년 2월 25일자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에 실린 '영화 독점 반대' 기사를 찾았다.
시카고 남부의 한 극장 주인이 영화의 제작부터 배급, 상영까지를 전부 거대 회사들이 장악하고 있어 시장 내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며 내건 소송을 발단으로, 정부와 대형 영화사 사이에 독점 관련 소송이 전개되었는데, 결국 정부의 승리로 사건이 종결되면서 한 사업자가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독점금지법 위반이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일명 파라마운트 판결이다. 이 판결로 파라마운트 픽처스, 워너 브라더스, 20세기 폭스 등 다섯 개 영화사는 극장을 팔아야 했다.
제이슨 스콰이어 USC 영화학과 교수 曰 대법원이 극장을 소유한 영화사에 대해 제작, 배급, 상영 중 한 가지 사업에서 손을 떼라고 판결함에 따라, 영화 제작사들은 상영 분야를 포기했다. 판결 이후 모든 영화배급사들은 어떠한 경쟁이건 공평한 조건 하에 개별 작품으로 승부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존 오 미 워너브라더스 사업개발본부장 曰 그 판결이 1948년에 났으니까 아주 오래 전 일인데, 이후 작품 간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결과적으로 할리우드가 좀 더 수준 높은 영화를 제작하는 데 파라마운트 판결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한국영화의 진정한 발전을 희망한다면
노혜령 CJ E&M 상무 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한국영화가 여태까지 해보지 않았던 장르 및 형태의 영화에 도전하는 것, 그것이 대기업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건전한 생태계를 조성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 좇는다면, 결국 영화산업 전체가 성장하지 못하고 세계화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안성기 영화배우 曰 작은 영화들이 모여 큰 영화가 된다고 본다. 작은 규모의 영화가 어려워지면 결국 큰 영화도 나오기 힘들다. 사전 투자 개념으로 생각하면 좀 더 마음 편히 공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한국영화 동반 성장 | 2013-01-29 | 시사기획 창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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