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쪽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frei, 평화Frie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65쪽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사건들이 빠르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것은 싹트지 못한다.

69쪽
우리가 전적으로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목표 지점에 이르는 공간적 간격은 그저 최대한 빨리 극복해야 할 장애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시공간적 간격이 오직 상실과 지체라는 부정적 측면으로만 느껴질 때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노력하게 된다. ...... 더 이상 사이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인생은 모든 사이가 제거되고 나면 그만큼 더 빈곤해진다. 

72쪽
간격이 짧아지면 사건의 연쇄는 가속화된다. 사건, 정보, 이미지 들의 조밀화는 머무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 진리Wahrheit란 지속되어야wahren 하는 법이다. 하지만 점점 짧아져만 가는 현재 속에서 진리는 빛을 잃는다. ......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 완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온갖 버전과 변형만이 난무한다.

81쪽
향기는 느리다. 매체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향기는 조급성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향기를 시각적 이미지처럼 빠르게 연속적으로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각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향기는 가속화되지 않는다.

83쪽
은유는 존재의 원자화 경향에 항거한다. 은유 만들기는 또한 시간적 실천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빠르게 지나가는 고립적 사건들의 연속에 관계의 지속성, 관계의 신의를 맞세우기 때문이다. 은유는 사믈들이 서로 친해질 때 발산하는 향기이다.

107쪽
고유한 역사성의 정수인 "자기의 항구성"은 사라지지 않는 지속을 의미한다. 그것은 흘러가버리지 않는다. 고유하게 존재하는 자는, 말하자면 늘 시간이 있다. 그가 항상 시간이 있는 것은 시간이 곧 자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 빠듯한 시간은 고유하지 못한 실존의 증상이다. 고유하지 못한 실존 속의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세계에 빼앗기는 까닭에 시간을 잃어버린다. 

123쪽
머뭇거림은 포획하고자 하는 모든 단호한 움직임에서 벗어나는 것과의 관계이다. 즉 그것은 "벗어나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 긍정적 흐름인 것이다. "만들어낼 수 없는 것 앞에서의 조심스러움에서 오는 늘니 속도"가 머뭇거림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사상가는 "이러한 흐름이 일으키는 바람" 속에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 "바람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는 대신.

129쪽
반드시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변화가 풍부해야 충만한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충만한 시간이란 곧 지속의 시간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는 반복도 굳이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속성이 붕괴된 후에야 반복은 반복으로서 의식되고 문젯거리로 떠오른다.

139쪽
그림 그리기 등을 배우는 것도 필요에서가 아니라, 다만 이를 통해 육체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능력을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운 것 곁에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 데서 생겨난다.

141쪽
"한가로움 속에서 기쁨을 주는 것은 짐을 벗어버린 나태함이 아니다. 기쁨은 진리의 탐구나 발굴에서 온다." "진리의 인식을 향한 노력"은 "자랑스러운 한가로움"에 속한다. 오히려 한가로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나태의 징표이다. 한가로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과 비슷하기는커녕 그것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한가로움은 기분 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머무름은 감각의 집중을 전제한다.

147쪽
산업화는 기계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통해서 시간과 노동의 경제학적 원리에 따라 인간의 행태를 육체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최적화하라는 명령도 도입되는 것이다. ...... 그 때문에 '긴장 이완'이나 '마음 끄기'는 일에 치우친 삶을 바로잡아주는 균형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연습은 무엇보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과정에 종속되어 있다. ...... 일의 지배는 너무나 완벽해져서 노동 시간 바깥에는 오직 때우고 죽여야 할 시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49쪽
시간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 모든 것이 가속화되는 듯한 인상이 생겨난다.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적이다. 소비재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소비재는 파괴를 구성적 요소로서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사물의 등장과 파괴의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성장을 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소비되기에 이른다. ...... 소비 태도로 본다면 '슬로푸드'도 '패스트푸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물이 소모되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속도를 줄이는 것만으로 사물의 존재를 탈바꿈시키지는 못한다. 

150쪽
노동의 시간, 더 정확히 말해 노동으로서의 시간은 지속성이 없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시간을 소모한다. 반면 긴 것, 느린 것은 소모와 소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지속성을 확립한다. 사색적 삶은 지속성의 실천이다. 그것은 노동의 시간을 중단시킴으로써 다른 시간을 정립한다.

151쪽
마음 놓고 써라: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그러나 진짜 강세가 어디에 있는지 잊지 말라: 행위가 있었던 것은 태초다: 왜냐하면 모든 고차적 발전은 게으르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 게오르크 짐멜

158쪽
인간은 가장 게으른 시간에 최상의 의미에서 소우주가 된다. 그런 순간이면 우주의 최종적 발전 단계까 곧 그 자신의 정신, 감정, 향유가 되기 때문이다. 

160쪽
사물의 생산과 소비는 노동의 주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서, 사물 곁에 사색적으로 머무르는 태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의 사회야말로 완전히 노동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이 저 자유로운 시간, 노동의 시간이 아닌 시간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점점 증가하는 생산성은 점점 더 많은 여가 시간을 만들어내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여가 시간은 더 고차적 활동을 위해서도 쓰이지 않고, 한가로움을 위해서도 쓰이지 않는다. 그 시간은 일에서의 회복이나 소비에 사용될 뿐이다. 일하는 동물은 쉬는 시간만 알 뿐, 사색적 안식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169쪽
더 많은 활동이 아니라 멈출 수 있는 가능성이 행동을 노동과 다른 것으로 만든다. 머뭇거릴 줄 모르는 사람은 노동자일 뿐이다.

166쪽
"활동적인 사람들은 돌이 구르듯이 구른다. 어리석은 기계의 원리에 따라서." - 프리드리히 니체

172쪽
거친 일을 기꺼워하는 너희,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모든 자들아, - 너희는 잘 참지 못한다. 너희의 부지런함은 도피이며 자기 자신을 잊으려는 의지이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을 위해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일도 적어지리라. 하지만 너희에게는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내용이 속에 담겨 있지 않구나  게으를 수 있을 만한 내용조차 없구나! - 프리드리히 니체

174쪽
사유는 단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사유가 자유로운 것은 사유의 장소와 시간이 계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유의 흐름은 불연속적일 때가 많다. 반면 계산은 단선적 궤도 위에서 이루어진다. ...... 'Sinnen'(숙고하다)은 고고독일어에서 여행을 의미하는 sinnan에서 유래한 것이다. 숙고가 나아가는 행로는 예측할 수 없고 불연속적이다. 계산하는 사유는 길을 떠돌지 않는다. ...... 시간의 압박 속에서 양가적인 것, 잘 분간할 수 없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것, 결정 불가능한 것, 부유하는 것, 복합적인 것, 수수께끼 같은 것은 조악한 명백함에 밀려난다. 니체는 노동의 조급성 때문에 "운동의 가락을 느낄 수 있는 눈과 귀"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가락 역시 우회로이다. 직접적인 것은 단조로울 뿐이다. 가락은 사유의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우회적인 특성을 상실한 사유는 빈곤해지고 결국 계산으로 전락한다.

181쪽
가쁜 숨을 헐떡이는 사람에게는 정신도 없다.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의 노예화로 전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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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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