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잡기' 도전 중이다. 틈나는 대로 책을 잡고 읽어보자, 읽으면서 세상 다반사에 책(責)도 좀 잡으며 떠들어보자는 혼자 하는 놀이다. 마흔 살이 되도록 완독한 책이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스무 권이나 될까 싶은 독서 젬병. 이후 5년간 백 배가 넘는(그래 봤자 300권도 안 된다) 책을 읽어제꼈다. 틈을 통으로 선사해주고 있는 회사 덕분. 여러 가지 열악한 근무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강력한 매력에 3년째 눌러앉아 독서 중이다. 

 

독서뿐이랴. 소비에도 젬병이다. 자본주의에 젬병, 그게 더 맞을까. 천 원을 아끼느라 종종대고는 만 원을 길에 흘리는 어이없음을 범한다. 흘렸음에 최대한 주목하지 않는 것으로 분통을 달래야 한다. 돈이란 걸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어느 편이 경제적인지 하는 고민은 이내 삼천포 행. 화폐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으며 자본주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를 궁금해하는 종류의 인간.

 

책을 잡기 시작한 지도 겨우 3년 차. 구매해서 읽어 본 경험이 없으니 책을 살 엄두가 안 난다. 로켓배송, 쓱배송, 총알배송, 갖가지 배송을 끼고 살면서도 어떤 배송으로도 책은 받을 수 없다는 듯 극구 사양 중이다. 배송으로 받아 본 책, 3년간 두 건 정도 기록했을까. 처참한 스코어다. 안 해 봐서 그래, 공공도서관에 힘을 싣는 나만의 캠페인이야, 미니멀 라이프의 일환이지, 라는 변명으로 돌려막는 중이다. 

 

책은 사서 읽어야 한다고도 하고, 공공도서관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도 한다. 아직까지 나는 후자 쪽이다. 밑줄도 긋고 싶고 메모도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자면 책을 소유해야 하지만, 보관하고픈 구절을 따로 적어두는 것으로 소유욕을 달랜다. 3년째 메모 앱을 옆에 두고 독서 중이다 보니 이젠 산 책이라고 펜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을지, 글쎄다.

 

요즘 공공도서관은 상호대차 서비스로,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다른 동네(같은 시) 도서관 책도 쉽게 빌려볼 수 있다. 대출중인 책은 예약하기 버튼만 클릭하면 다음 대출자로 줄서기가 가능하다. 책이 반납되면 친절히 카톡 메시지를 보내온다. 미처 비치되지 않은 책은 희망도서 신청란에서 도서관을 지정하여 신청할 수도 있다. 상당히 편리하다. 

 

대출중인 책을 예약할 수 없는 경우는 다른 사람이 이미 예약을 했을 때다. 내내 대출중에, 예약까지 어려웠던 책. 수시로 검색하다 결국 예약에 성공했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책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 도서관에 쪼르르 달려갔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펼쳤다. 곧 실망했다. 누구의 소행인지, 책엔 연필 자국이 수두룩했다. 체크표시, 밑줄, 동그라미. 가능성을 떠올렸다. 개인이 본인 소유의 책에 연필을 놀리며 읽다가 추후에 기증을 했거나, 급히 독후감을 써야 하는 누군가가 판단력을 상실해 여기저기 뽑아 쓸 단어에 연필을 댔거나, 그저 몰상식한 독자가 공공도서관에서 대출했을 뿐인 책을 사유물로 취급했거나.

 

누군지, 무엇엔지 모를 실망을 뒤로 하고 지우개를 꺼냈다. 애정하는 작가의, 볼수록 사랑스런 책의 지면에 휘갈겨진 흔적이 거슬렸다. 지우개 가루를 조심조심 모아 가며 몇 페이지 작업을 완료했다. 처음 몇 장뿐이겠지, 짐작은 틀렸다. 연필질은 마지막까지 성실히도 남겨져 있었다. 나의 지우개질도 엉겁결에 마지막 장까지 이어졌다. 뿌듯하고 답답하고 안타깝고 후련하게.

 

책 뒤표지에는 이렇게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이 책은 김포시 장기도서관 자료입니다. 여러분이 함께 보는 책이니 소중하게 다루어 주십시오.' 끝장에 적혀 있어서 표시를 다 해버린 후 발견했기 때문에 연필 표시를 중단 못 한 걸까? 어느 정도이든 사회주의를 담은 책에, 바로 그 공공자료에 흠집을 내기란 어떤 이유로 가능했을까? 애타게 궁금하다. 지우개 똥 모으기는 완수 가능했다. 사회주의를 귀엽게 풀어준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이 책에서 사회주의자를 만날 이들이 눈살 찌푸리지 않고 유쾌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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