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쪽
모리스는 인간 가치관의 거시적 역사를 제시한다. 인간 발전 과정을 연속적 3단계로 나누고, 그 단계들을 관통하는 유사성을 광범위하게 통찰한다. 각 단계의 인간 문화 유형을 결정하는 요인은 에너지 획득 방식이고, 이는 생산성 향상 방향으로 진화한다. 그 방향으로 수렵채집, 농경, 화석연료 이용이라는 세 가지 에너지 획득 방식이 연속적으로 출현했다. 모리스 이론의 핵심은 에너지 획득 방식이 해당 시대에 유효한 사회 체제와 해당 시대에 득세할 사회적 가치들을 '결정'하거나 최소한 '한정'한다는 것이다.
38쪽
에너지 획득 방식이 거기에 어떤 인구 구조와 사회 체제가 가장 유용할지를 결정하고, 다시 이것이 어떤 종류의 가치관이 번성할지를 결정한다. ...... 우리는 좋든 싫든 이 프로세스를 타고 해당 가치관으로 떠밀려 갈 뿐이다.
41쪽
경제학자 존 케인스는 어느 날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에 이렇게 답했다. "사실이 바뀌면 나는 의견을 바꿉니다. 그쪽은 어떻게 하시나요?" 케인스가 정말로 이렇게 말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 2만 년 동안 인류가 해온 것에 대한 예리한 묘사인 것만은 틀림없다. 생물학적 진화가 우리에게 준 것 중 하나가 상식이다. 상식은 우리에게 사실에 적응하라고 말한다.
55쪽
농경시대 지식 엘리트가 수렵채집인을 언급한 이유는 주로 자신들의 농경 가치관 홍보를 위한 일종의 확성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66쪽
쿵 족 남자들은 '건방진 사람'을 '잘난 추장'이라고 조롱하거나 면전에서 무시하는 방법으로 기를 꺾어 놓는데, 이와 비슷한 행동이 전 세계 수렵채집 사회에서 공통으로 관찰된다.
68쪽
수렵채집이라는 에너지 획득 시스템은 부의 축적에 염격하고 현실적인 제한을 둔다.
70쪽
우리가 아는 한 수렵채집 집단에서는 생산 수단을 독점한 불로소득 집단이 발생한 적이 없다.
71쪽
수렵채집인은 우연히 좋은 것을 발견했을 때 남과 나누지 않는 것을 '건방진' 것만큼이나 죄악시한다. ...... 사냥에서 동물을 잔뜩 잡아 와도 본인이나 가족의 미래를 위해 고기를 비축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풍요를 남과 나누고, 오늘 내 호의에 덕을 본 사람이 다른 날 내게 보답할 것을 기대하는 편이 낫다
81쪽
농경민은 '길들인(작물화, 가축화)' 동식물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삼는 사람들을 말한다. ...... 농경의 핵심은 활용자원의 유전자 풀을 개조하는 것이다.
89쪽
수확량이 늘고 경제 통합이 진행되면서 대형 하천 유역에 수만 명, 때로는 수십만 명의 인구를 헤아리는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나고 문명이 열렸다.
92쪽
농작으로 1인당 에너지 획득량이 여섯 배로 증가하면서 사회의 규모와 부양의 부담도 증가해 사람들은 농지에 매여 노동 강도를 높여야 했다. ...... 농경지 단위면적당 에너지 획득량이 꾸준히 늘면서 수백만 명씩 먹여 살리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야말로 등골 휘는 끝도 없는 노동이 있었다.
101쪽
농경 세계에서 떵떵거리고 살려면 집과 경작지, 가축은 물론 우물과 담장, 연장을 보유해야 하고 ...... 윗대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있느냐 빈손이냐의 문제는 말 그대로 생과 사의 문제다. 이렇게 걸려 있는 게 많다 보니, 농경민 남자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받을 아이가 자기 자식이 맞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를 느낀다. 수렵채집 사회는 정조 관념에 상대적으로 무심했지만, 농경 사회는 딸들의 혼전순결, 아내의 혼외정사를 맹렬히 감시했다. ...... 초기 농경 사회의 상당수가 조상에 집착했고, 나아가 조상을 초자연적 존재로 숭배한 것으로 보인다.
105쪽
근대 이전에는 농장 노동자 한 명당 생산량이 낮았기 때문에 노동의 한계 생산물, 즉 고용주가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해서 얻는 추가 이익이 미미했다. 따라서 생계수단이 따로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장에서 형성되는 노동임금이 전혀 매력적인 대안이 아니었다.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에 따라 가족 공동체나 혈연 공동체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노동인력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두 번째 제도가 부상했다. 바로 강제노동(부역)이었다. 사회는 고용주 입장에서 긍정적 한계생산물이 발생하는 선까지 노동비용을 낮추기 위해 폭력을 동원했고, 그 결과 노예제와 농노제가 실패한 노동시장을 대신하게 되었다. ...... 에너지 생산량이 1인당 1일 1만 킬로칼로리 이상인 농경 사회에서는 강제노동이 가부장제처럼 기능상의 필요조건이었다.
117쪽
백성을 포식자로부터 지키는 선한 목자, 백성을 대표해 신성의 영역을 직접 상대하는 신의 대리자라는 왕의 이미지는 농경 사회 정치철학의 주요 산물이었다. ...... 헤시오도스의 시대로부터 1천 년 넘게 흐른 기원후 5세기, 지금의 튀니지 지역의 빈민이 불평등 폐지에 반대하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상황을 괴이하게 보기는커녕 당연하게 여겼다. 빈민이 원하는 것은 평등이 아니라 그저 부자의 반열에 드는 것이었다.
121쪽
봉기할 때도 왕이나 황제나 교황 등 최고 권위자가 아닌 해당 지방당국 타도를 목표로 삼았다. ...... 농민 저항이 사악한 아랫것 징계를 표방하다 보니, 봉기가오히려 왕의 올드딜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39쪽
농경은 사람들이 폭력적 죽음을 당할 일이 적어져야 굴러간다. ...... 농경은 폭력을 문제로 만들었고, 동시에 폭력을 다스리는 해법도 만들었다. ......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치자는 신민에게 정부만이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음을 믿게 할 필요가 있었다. ...... 그 과정에서 '명예를 아는 남자'의 개념이, 폭력 사용에 적극적인 남자에서 자제력이 강한 남자로 바뀌었다.
143쪽
길들인 자원에서 에너지를 획득하는 일은 야생 자원에서 에너지를 획득할 때와는 다른 제약들을 부과했고 다른 기회들을 창출했다. 농경민은 엄중히 계층화되고 정도껏 평화가 유지되는 세상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위계와 평화에 가치를 두게 되었다.
163쪽
화석연료로 증폭된 에너지의 흡수와 활용에는 시장이 필수적이었는데, 사람들의 숭배 대상과 결혼 대상, 직분을 지정하는 전통법이 시장의 성장에 방해된다면 그런 전통은 사라져야 마땅했다.
175쪽
"동물에 대한 행동에 있어서 인간은 모두 나치다." 노벨상 문학상 수상자 아이작 싱어가 1968년에 한 말이다.
185쪽
수직적 위계와 수평적 위계 사이의 줄타기는 화석연료 시대 정치의 특징이다. ...... 여기에 부응해 화석연료 가치관은 지난 200년 동안 부의 불평등을 줄이는, 하지만 너무 줄이지는 않는 정부를 옹호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187쪽
나치의 노사통합단체 독일노동전선은, 반발하면 강제수용소로 보내겠다는 협박과 함께 고용주 측에 유급휴가, 임금협약, 동일임금의 시행을 강제했다. 그러나 이런 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치당이 집권한 1933년이 저물기도 전에 당 지도자들은 기업가 편을 들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야심찬 재군비 계획에는 기업가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 레닌 본인은 "부르주아와 손을 잡고 공산주의를 수립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211쪽
'긴 여름'은 농경의 발명에 필요조건이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충분하려면 두 번째 조건이 필요핶고, 그 조건은 바로 '우리'(현생 인류)다.
214쪽
행운의 위도권에는 길들이기 좋은 동식물이 지구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 자체는 지구 어디서나 비슷했다. 동식물 길들이기는 그것이 가장 용이했던 곳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을 뿐이다.
217쪽
최초의 농자들에게도 우리처럼 자유의지가 있었다. 가족마다 구성원이 늘면서 대지가 붐볐다. 원시 풍요사회는 점점 굶주렸다. 그래도 그들은 자식들에게 동식물을 길러 가며 고달프게 사느니 차라리 굶어 죽자고 말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1만년 전 요르단 강 유역의 일부 수립채집인은 그런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단번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만 명이 같은 고민을 했고, 가족마다 노동 강도를 높이느냐 굶느냐의 기로에서 일 년에도 몇 번씩 결정을 재고하고 번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 강도를 높여 동식물 관리를 심화하기로 결정하는 가족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나머지의 차지가 점점 감소했다는 것이다. 본인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동식물을 공동 자산이 아니라 본인의 텃밭과 떼로 인식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계속해서 수렵채집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수확은 그만큼 줄었다. 성공 가능성이 자꾸만 반대편에 쌓이면서, 운명의 저울은 용감하게 또는 완고하게 종전 방식을 고수하는 수렵채집인에게 불리하게 기울었다.
227쪽
역사학자들은 17~18세기의 유럽 중심 대서양 교역을 삼각 무역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공산품, 아프리카 노예, 아메리카의 열대작물을 엮는 삼각 무역망은 역사상 최강의 수익창출 기계로 기능하며 유럽을 살찌웠다.
230쪽
그 시절 영국사 교과서는 모두 1870년 즈음에 멈춰 있었다. ...... 1870년은 영국사에 자랑스러운 마침표를 찍기에 딱 좋은 시점이었다. ...... 그들의 교과서는 미국이 세계를 주름잡았던 1970년 즈음에서 멈췄다고 한다. 미국이 역사의 마침표를 찍기에 좋은 지점이었다.
243쪽
가치관과 물리적 현실은 분리할 수 없다. 물리적 세계는 가치관을 담는 그릇이다. 수렵채집 무리의 연장자부터 플라톤과 맹자를 거쳐 칸트와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틀어 도덕철학자들이 한 일은 결국 본인이 속한 에너지 획득 단계에서 가장 유용하다고 판단되는(또는 가장 유용했으면 하는) 가치관을 개진한 것에 불과하다. ...... 내 이론은 특정 해석을 내세워 보편의 진리로 주장하는 모두를 싸잡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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