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너는 위아래도 없냐'는 말도 흔하다. 둘은 반대다. 위아래가 없다는 주장과 있다는 주장. 상황 불문, 어떤 말에 속이 뒤집히냐 묻는다면 후자를 고르겠다. 대부분 나와 같은 선택을 하리라 생각했다. 이해가 부족했다. 사람에 대한 이해도, 인류에 대한 이해도, 역사에 대한 이해도.

 

위아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굳이 위아래를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갑의 위치를 점하려는 수작인 줄 알았다. 말을 짧게 해도 되는, 존댓말을 들을 수 있는, 남들 눈에 성공한 듯 보여 우쭐해지는 자리 탐하기라 여겼다. 혹은 기사 딸린 차를 타는, 이익의 더 많은 비율을 가져가려는 금전적 욕심의 발로라 여겼다. 안타깝다는 표현 외에 달리 붙일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혼란스럽기까지 하지만, 만만치 않게 설득력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를 접했다.

 

"대외적인 차원에서 는 어떤 외부의 권위에 대해서도 자유로우며, 다른 △들과 평등한 동격의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다른 들과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있다."

 

김준석의 <근대 국가> 39쪽의 일부다. △는 '(근대) 국가'. 국가들이 평등하기 때문에 경쟁한다는 얘기다. 평등하지 않으면, 상하관계가 분명하면 경쟁하지 않는다는 의미. 승산이 있어야 덤비고 게임이 안 되면 애초에 붙지 않는다는 거다. 우위를 점하기 위한 단순 경쟁은 물론이거니와 전쟁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경쟁의 목표는 영향력, 권력,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생존이며,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수반된다."

 

일리 있다. 아이들끼리는 장난감도 빼앗고 빼앗기며, 달리기도 속도전을 겨룬다. 해볼 만하다 생각하고 덤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 마음에 안 들어도 덤빌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질 게 뻔해서다. 경제적 손실, 국제적 협약 따위는 구실일 뿐이다. 위아래가 분명해서 안 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대화도 하고 협상도 하면서 평화롭게 지낸다. 간간히 억울하거나 서운할 때도 있지만 외관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 서로 손실을 줄이고 이익을 최대화하는 관계를 도모하고 있다. 힘의 차이가 평화를 불렀다.

 

사장과 직원 사이도 평화롭다. 얄밉고 고까운 일이야 다반사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은 사장에게 보고서를 바치고 결재를 구한다. 걸핏하면 들이받는 직원에게 징계를 내릴지언정 사장은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관계를 이어간다. 직원은 매사 사장의 결정을 따른다. 누구의 뜻대로 할지 매번 고민하거나 다툴 필요가 없다. 사장은 직원의 윗사람이기에 결정하고 지시하면 그만, 아랫사람인 직원은 그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다. 질서정연하다. 

 

상하관계를 만들어놓으면 무모하고 소모적인 싸움을 줄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이해해볼까? 위아래를 따지고 기회가 될 때마다 이를 분명히 하려는 사람들. 이들은 질서를 원했던 것이라고.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 반복 피력하거나 명문화함으로써 함부로 덤비지 않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피 튀기는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질서를 잡으려는 것이라고. 참으로 선한 취지로군,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

 

두 가지가 걸린다. 첫째, 왜 '위'만을 고집하는가. 평화는 누가 위이든 위, 아래만 존재하면 가능한 것인데, 본인이 '아래'를 맡음으로써 질서를 잡겠다는 이는 도무지 없다. 때문에 본인이 위에 있어야 질서가 유지된다는 주장은 그저 이기적인 심보로 비칠 뿐이다. 위아래를 구분 짓는 것이 평화를 위한 시스템 정비인 양 허울만 그럴듯하게 내세운 것 아니겠는가.

 

둘째, 명확한 상하관계를 기반으로 한 평화가 진정한 평화일까? 끔찍하지만 학교폭력을 생각해보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위아래 구분이 확실하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심부름을 저항 없이 도맡는다. 폭언과 폭행도 묵묵히 감내한다. 고성도, '주고받는' 폭력도 없다. 오죽하면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교사가 친하게 지내는 사이 내지는 친구들끼리의 장난으로 넘길까. 평화는커녕 비극 중의 비극이다. 가정폭력, 군대 내 폭행,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 상하관계로 인한 조용한 비극의 예는 허다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우나 속은 곪아 버리는 침묵일 뿐이다. 

 

문득 남북관계가 떠오른다.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는 쪽과 존중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는 쪽이 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압박해서 북한의 무릎을 꿇리자는 의견. 괜찮을까? 거짓 평화에 기대다 어떤 봉변을 맞을지 불안한 게 당연하지 않나. 한편 북한의 체제와 현실을 존중함으로써 평화를 이끌어내 보려는 방식에 대한 이의 제기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아쉬운 게 사실이니까. 안타깝게도 상하관계를 통한 평화에 다시 힘이 실리는 지점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위아래를 구분 짓는 이들의 발상을 눈꼽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을 놀이'가 그리도 즐거울까 싶었다. 물론 이들이 '갑질'만 하는 건 아니다. 갑으로서 인정과 아량을 베풀기도 한다. 단 '위'에서 베푼다는 것. 아파트 입주민이 경비원에게 먹거리를 나누어주는 일, 사장이 직원의 고용을 유지하는 일, 반 친구가 학교에서 같이 놀아주는 일 등 갑이 베푸는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들이다. 상대를 두 번 울리는 뼛속 깊은 갑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감사'하며 평화를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신입 직원에게 부여되는 수습기간은 회사가 직원을 살피는 동시에 직원도 회사가 본인에게 맞는지를 판단하는 기간임에도 이런 의견에 펄쩍 뛰는 직원들이 상당수다. '써 주는 게 어디냐'는 세뇌를 하도 들어서다. 이들을 비난할 순 없다. 철저히 '교육' 받은 죄밖에 없기 때문이다. 학교가, 나라가, 문화가 그리 가르쳤다. 대한민국 문화 안에서 고민하고 돌아보고 다시 볼 일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따뜻이 보듬으며 힘이든 돈이든 가진 것을 나누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따를 때 평화가 유지된다는 주장. 이제 일부 이해한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존재할 때 보다 질서정연해 보일 수 있다. 다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 이를 단순히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건강한 평화란 동등한 관계로 지지와 비판을 자유로이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비판적 사고라고는 일체 배울 기회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건강한' 평화가 '조용한' 평화보다 장려할 일 아닌가 생각한다. <근대 국가>의 한 대목처럼 '동등'과 '안정(질서)'이 양립할 수 없다면 꾀해 보자. 언제, 누구와, 얼마만큼의 동등과 안정을 섞어 관계를 쌓을 것인지. 동등 대 안정이라는 두 가지 방식 모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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