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칼로리'로 일종의 '점수'를 받는다. 자전거 타기는 30분당 몇 칼로리, 배트민턴은 몇 칼로리 하는 식이다. 운동의 목적이 대부분 체중감량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열량을 소모하여 극적인 체중 감량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다는, 얼핏 친절한 정보로 보인다. 인간의 몸은 신비롭고 복잡하고, 정신이 섞이면 더욱 종잡을 수 없다. 온도나 습도, 바닥상태, 몸 상태, 착용한 복장, 운동 시간대 등에 따라 어떤 운동이 몸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가늠하기 어렵다. 통계는 통계일 뿐, 평균은 평균일 뿐 내 얘기는 아니다. 길은 불투명하다. 애써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본인만의 길을 뚫으면 된다. 시도하고 돌아보고, 계속하거나 다른 걸 시도하거나.

자본주의가 아마존 저 끝의 나무까지 탐하듯, 운동에 대한 관심도 종목을 불문하고 요란히도 들쑤신다. 시대에 발맞추어 작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웨이트 PT도 받아보았고, 처방전으로만 구할 수 있다는 향정신성 의약품도 삼켜 가며 오만 가지 다이어트를 탐닉해온 세월이 어언 25년. 40대 중반에 접어든 시점에 '걷기'에 정착을 꾀해본다.

결심은 하정우의 <걷는 사람>에서 비롯. 하와이에 '걸으러' 간다는 허세만 질끈 참아내면 꽤 흥미로운 '썰'이다. 마음을 동하게 하여 운동화 신고 현관문을 나서게 할 만큼 설득력과 감동을 품었다는 점에서 <걷는 사람>을 통한 하정우와의 만남은 감사하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 만보 걷기 챌린지'는 기분 좋은 일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올해(2023년) 4월 초 시작. 첫 달에 무려 '스무 날 실행'이라는 흐뭇한 기록을 달성했다. 달이 바뀐 김에 돌아보며, 내다본다.

​묻지마범죄, 헬조선, 이생망, 보복운전, 갑질 등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져나오는 분노를 접한다. 나 자신부터 진정할 필요를 느낀다. 시간적으로 한숨 고르고 생각하자면, 공간적으로 한발 물러나 바라보자면 걷기가 제격이다. 가만히 서서 심호흡만 해도 도움이 되지만 '가만히'가 생각보다 어렵다. 걸으며 시간과 공간을 벌리면 나도 모르는 사이 다소 차분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딴생각이 화를 몰아내기도 하고 오감으로 접한 감각이 화낼 여력을 삼키기도 한다. 한두 걸음에서 멈추기보다 오히려 계속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쉬워서 첫걸음을 떼기만 하면 효과를 보는 데까진 금방이다.

​오감을 만끽하는 것 자체가 낙이 되기도 한다. 신발이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제품의 리뷰어로 등판하자. 가성비가 어떻고 방수기능이 어떻고 로고 크기가 어떤지 이러쿵저러쿵 신나게 풀어본다. 속도를 뽐내며 앞질러가는 중년 남성이 땀냄새를 뿜으면, 담배 냄새보다 건강하고 인간적이라 감사하다며 때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혼잣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늙었구나 감지하고 피식 웃음도 흘려본다. 미세먼지와 탈모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코 정수리에 비 한 방울 닿게 할 수 없다는 결의를 과감히 풀어헤치고는 야구모자 하나, 바람막이 점퍼 하나 걸치고 빗속을 가로지른다. 축축해진 점퍼가 팔에 들러붙는 느낌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빗물이 챙에 맺혀 똑 떨어지면 땀방울 흘리듯 흐뭇한데 이유는 알 수 없다.

땅을 보며 걷는 사람이 있고, 주변을 보며 걷는 사람이 있다. 고개를 치켜들고 걸어도 지나치는 사람을 일체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고개를 떨구고 걸어도 주변의 말소리에 귀를 쫑끗하는 사람이 있다. 남보다는 자신이 관심의 대상인 내향인은 옆에 누가 지나가든 관심이 없고, 감각 아닌 직관형은 벗꽃이 피든 지든 별 감흥이 없다. 소파에 누워 예상한 산책의 유용성은 커 보이지 않았다. 내향적 직관형이라는 이유로. 나서보니 다르다. 스쳐가는 행인들을 구경하고 내 안의 생각을 풀어가는 재미가 있다. 꽃의 색과 향에 쓰러지지는 않아도 식목일에 몇 십년 간 소나무만 심어 우리나라가 산불에 취약하다는 뉴스를 떠올리며 다양성의 중요함을 새삼 떠올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과 두서없는 딴생각, 때로는 멍때리기와 명상 사이의 무념무상 '걷기봇' 지경까지. 여러 가지 정신상태를 경험한다.

​고작 한 달 남짓 걸어놓고 말이 길다. 다짐이니 그렇다. 좋았던 '걷기' 기억을 차곡차곡 저장해서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아 한동안 꾸준히 걷겠다는 다짐. 걸으며 즐기고 되짚으며 한 번 더 즐기는, '프로 즐길러'다. 오늘도 나서볼까. 80은 족히 잡수신 듯한 구부정한 그 할아버지가 오늘도 공원에 행차하실지 확인해볼 겸.​

 

2023년 5월 2일

김포에서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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