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엄기호


40쪽
선아가 고통을 겪는 것은 선아의 생애사나 개인적 특성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 선아가 그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겪는 이유는 선아의 삶의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자기에 대한 앎이란 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48쪽
고통의 무의미성이야말로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가장 큰 고통이다.

88쪽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 언어가 무너질 때마다 선아는 완전히 무너졌다.

111쪽
의미는 발견되는 게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다.

114쪽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141쪽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성과를 내야 한다. ...... 우리가 사는 이런 사회를 '성과 사회'라고 한다. ...... 성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없다면 무엇으로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사회적 영역에서 더 이상 존재감을 얻기가 힘들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존재감을 얻을 수 있을까?

156쪽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친밀성 영역이 잘 구축되어 있으면 존재감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고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영역에서의 성과만큼이나 친밀성 영역에서의 사랑과 우정은 사람이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160쪽
나는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유익한 존재가 되려 하지만, 그와 나의 관계에서 유익이 아닌 현존이 핵심이라는 서로 간의 확신이 없다면 이 관계는 쉽게 흔들린다. 사랑과 우정 모두 그 확신이 없을 땐, 내가 그에게 유익하지 않아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들기 마련이다. 현존의 기쁨에 대한 확신은 사랑과 우정에서 필수적이다.
...... 사회적 영역처럼 친밀성 영역에서도 존재감은 '현존'이 아니라 필사적인 '관심 끌기'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170쪽
우리는 그의 현존을 재밌어하는 게 아니라 그의 행위로 재밌다고 여기며 그 행위를 '소비'한다. 기쁨이 타자의 현존과 관련된 것이라면 재미는 타자를 소비한다. ...... 우리는 존재감을 위해 관심을 끌어야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재밌는 인간이 되어야 하고, 재밌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플레 인간'이 되었다.

177쪽
여기에 소수자들이 느끼는 고통의 핵심이 있다. 이들은 '모자란 존재'로 재현되고 그 재현을 통해서만 사회에 존재할 수 있기에 그 외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181쪽
그가 불쾌해하는 순간 중단해야 한다. 목적이 그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의 하에 전체 분위기를 좋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림감이 된 사람에게는 즉각 '존경'을 표해야 한다. 전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조롱거리로 내어준 것에 대해서 말이다.

188쪽
관종이라는 존재 한 명을 본다면 이것은 심리학적이거나 병리학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관종이 대량으로 양산되고 있다면 이것은 사회적 현상이다. 한편에서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기여를 하며 존재감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제공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전환된 사회에서 주목을 통해 존재감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192쪽
팩트는 '사실'보다는 '단편'이라는 뜻에 훨씬 가깝다.

217쪽
콜로세움의 본질은 검투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검투를 구경하는 극장이다. ...... 이 관심의 콜로세움에 모두가 있다.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끌고 와 사자 밥이 되게 하는 노예 상인들이 있다. ...... 다른 한편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비참과 고통을 밀쳐내야 하는 검투사들이 있다. ...... 그리고 관객들이 있다. ...... 팝콘을 손에 들고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이 플랫폼을 가장 공고히 하는 '공동정범'들이다. ...... 관심을 끌어 존재감을 구하려고 하는 이 콜로세움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혐오다. 

221쪽
이처럼 관종 현상의 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혐오가 짙게 깔려 있으며 모두를 인간 혐오자로 몰아간다. 이 혐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콜로세움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234쪽
그렇다면 고통의 당사자는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곁에 설 수 있는가? 절규하는 자에서 말하는 자로 바뀔 수 있는가? 근대 사회는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훌륭한 도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보편화했다. 바로 글이다. ...... 이것이 근대 초기에 일기와 자서전 쓰기가 그토록 붐을 이룬 이유다. ......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할 수 있었다.

251쪽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우연히 눈에 보이는 것을 놓고 이야기하게 된다. ...... 길을 걸으며 이야기하게 되면 '오리'처럼 가치관을 매개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주어진다.

256쪽
바깥이 존재하며 머무르되 벗어날 수 있음, 이것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과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의 결정적 차이다.

263쪽
고통苦痛은 고통孤通이 되었다. 선아에게 걷기는 고통이 외로움을 통해 인간을 소통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273쪽
여기에서 국가를 넘어 세계를 시공간적으로 압축시킨, 인터넷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의 역설이 시작되었다. 어딘가에는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 안에 안주함으로써 다른 세계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바깥에는 만리장성을 쌓았고, 그 바깥은 세계도 아닌 세계로 적대했다. 이것은 인쇄술로 만들어졌던 공론장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인쇄술이 바깥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안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었다면, 인터넷은 반대로 안에 웅크리고 앉아 내부와 절대적으로 동일시하며 바깥은 끊임없이 적대시하도록 한다.

274쪽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의견 충돌이라는 '정치'가 아니라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한 충성 경쟁이다. ...... 사람들은 내부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외부를 조롱하고 비웃고 사냥하는 글들이 난무했다. ...... 사물과 사람, 사태를 보는 입체적인 이야기는 배척 받아 사라졌다. ......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남았다.


​[네이버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지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는 고통의 문제가 사회 속에서 고민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한국 사회 내부의 깊은 속살을 드러내왔던 사회학자 엄기호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고통의 지층을 한 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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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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