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선의 - 문유석


​19쪽
화투 한 판을 치더라도 룰 미팅을 먼저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전국구 타짜인 경상도 짝귀와 전라도 아귀가 손모가지 걸고 배틀을 붙는데 각자 자기 동네 룰로 승부를 내자고 우긴다고 치자. ...... 온갖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쉴새없이 벌어지지만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헌법을 들먹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큰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각자의 프레임을 들고 와서 상대를 악마화하기에 바쁘다. 이래서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지 않을까.

23쪽
그동안 사람들이 헌법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법이란 그게 뭐든 학생들이 따라야 하는 교칙처럼 저 위의 누군가가 자신을 규율하는 갑갑한 구속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 검색창에 '헌법'을 친 후 읽어보시라. ...... 헌법이라는 계약서의 갑은, 국민이다.

33쪽
이 당연한 이치를 거꾸로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역사를 들먹이며 민족이나 국가같이 개개 인간을 초월한 위대한 존재가 있고 개인은 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전체주의고 파시즘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이들이 내세우는 거창한 집단이 아니라 그로 인해 실질적인 이득을 얻는 개인을 봐야 한다.

34쪽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37쪽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을 최상위로 하는 우리나라 법 체계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라고 앞 글에서 분명하게 얘기했다. ...... 대단한 철학자나 되어야 감히 논할 수 있다? ...... 인간이 진짜로 존엄하긴 한가? ...... 인간은 이성에 바탕을 둔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인격의 주체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얘기다. ......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도덕적 자율성에 두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독자적으로 양심에 따른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존재이므로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존중되어야 하고,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인류는 오랜 역사 끝에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모든 인간을 존엄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회계약을 이루어냈고, 이것이 문명국가의 헌법이다. 

88쪽
이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승복시킬 수 있는 승리가 중요하다. 반칙으로 얻은 승리는 분쟁을 종결하지 못한다.

91쪽
최초의 자유는 귀족 계급의 자유였다. 프랑스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부과되는 막대한 세금, 그리고 존 왕의 무능과 실정을 견디다 못한 영국 귀족들이 1215년 무장 반란을 일으켜 왕을 겁박한 끝에 얻어낸 타협 문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가 헌법적 자유의 기원이다. 자유를 보장 받고자 한 주체도, 그 대상도 한정적이다. 귀족들이 왕의 억압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 한 가지 더한다면 교회의 자유였다.

96쪽
원래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타자에 의한 간섭, 구속만 없으면 자기가 알아서 이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간섭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는 입장의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적 조건의 분배'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유의 개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강조되어야 하는 수단이 다를 뿐이다. 

101쪽
자유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고결하고 도덕적이고 훌륭한 생각만 보호하지 않는다. ...... 더구나 '도리'도 '죄'도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 나는 가끔 서울 밤하늘 가득히 '남이사'라는 세 글자를 띄워두고 싶어진다.

146쪽
헌법의 시각에서 보면, 놀랍게도 형벌은 '시민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징역형은 신체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고 벌금형은 재산권에 대한 제한이다. ...... 벌이란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시민들의 상식이고, 동양의 전통적인 형벌관에 가까울 텐데 ...... 이 시각 차이에서 형사사법과 국민 법감정의 괴리가 근본적으로 시작된다.

205쪽
이것이 발전이다. 자유가 사회를 견인하되, 그 속도가 누군가를 낙오시켜 쓰러지게 만들지 않도록 평등이 제어하는 것. 무조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면 잠시 멈출 줄도 아는 것. 어쩌면 그 망설임의 순간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215쪽
노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공공성에 기반을 두고 있듯이, 능력에 대한 사회적 평가 역시 공공성과 관계없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232쪽
헌법에 있는 평등에 관한 조항이 무엇인지 물으면 거의 대부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대답한다.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법 앞에' 평등하기만 하면?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말고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에서 평등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237쪽
인공지능이 어느 직업까지 대체할 수 있는지는 테크놀로지의 문제라기보다 가치관의 문제, 정치의 문제다.

240쪽
과학기술의 위력이 압도적일수록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생명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도 이득이 될 경우여야 정당화될 수 있다는 존 롤스의 <정의론>이야말로 인공지능 시대에 꼭 필요한 원칙이 될 수 있다.

243쪽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대단한 직업을 만들어내기보다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일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일지 모른다. 

253쪽
헌법은 결국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다.


[네이버 책] 최소한의 선의 -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류가 공유해온 타협의 기술이다”저마다의 가치관이 부딪히고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는, 누가, ‘모두의 약속’을 위반하는지 따져보면 된다『개인주의자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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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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