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되는 시간 - 윤여일


38쪽
천막촌의 활동은 성취해야 할 과제를 스스로 생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아가려다가 번번이 벽에 가로막힌다면, 그 벽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면, 벽을 바라보는 시각, 벽과 부딪치는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

56쪽
고병권은 "주변화margin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국책사업과 대중에 대한 추방 현상의 문제를 포착한 적이 있다. 그는 마진margin이라는 말이 갖는 다양한 함의에 착목하는데, 마진은 주변boundary, 한계limit, 이익profit 등의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마진이라는 말을 이렇게 읽어 들인다.
마진의 첫 번째 의미인 "주변"은 권력과 부의 영역에서 부차화된 대중의 위치를 나타낸다. 마진의 두 번째 의미인 ‘한계’는 대중의 삶이 처한 상황을 나타낸다. 마진의 세 번째 의미인 "이익"은 국가권력과 자본이 대중을 주변화시켜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주변이라서 군사기지, 전력시설이 들어선 마을. 주변화된 마을. 그곳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이자 주권의 폭력적 정체와 자본의 착취적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한계지대다. 그곳에서는 불안정과 위기가 삶의 기본 조건이 된다. 

58쪽
천막촌은 점거 운동이다. 점거하여 멈춰 세우는 싸움이다. 점거는 막아서는 것이다. 단식은 정지함으로써 중지시키는 것이다. 천막촌은 폭주하는 현실을 멈춰 세우려 한다. ...... 그런데 일시적인 점거가 향한 곳이 국회의원실, 도지사실, 총장실, 사장실이었다면, 길게 이어진 점거는 대부분 자신들의 삶터, 일터에서 이루어졌다. ...... 그들은 왜 자신들이 살던 곳, 일하던 곳을 점거했던가. 삶터, 일터에서 뜯겨져 나오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138쪽
추방되는 자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자 할 때 무얼하는가. 점거한다.
그렇다면 배제된 자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자 할 때 무얼하는가. 난입한다.

72쪽
이것은 바디우의 말이다.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 우리에게 제공된 선택의 기회는 정작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왜 우리의 손에는 1번 아니면 2번이라는 협소한 선택지밖에 없는가. 왜 우리의 상상력은 당장 가능한 일로 제약되고 있는가.

 

137​쪽
지금의 대의민주제 자체가 대중에게 배제적이다. 대의민주제는 공고해졌다지만 정작 자기 주장을 대변할 창구가 없는 대중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의제가 듣지 못하는 목소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체를 위해 희생되는 자들(결국 전체에 속하지 못하는 일부), 합의에 의해 배제되는 자들(결국 합의 상대가 아닌 자들), 국민이라고 호명하며 착취하는 자들(결국 국민국가 내부의 피식민자들). 지금의 대의민주제 아래서 그 자들은 이제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그 자들이 대중의 형상이 되고 있다.
의 정치학을 사고할 시대다. 국민-시민-주민-민-기민-유민-난민.

182쪽
다수결은 논의를 양자택일로 만들어 그 폭을 좁힌다. 더욱이 그 결과 다수와 소수로 갈렸다는,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을 남긴다. 다수결을 통해 그 사안이야 결정 내릴 수 있겠지만, 그로 인해 집단의 역량 자체가 감퇴할 수 있다.

94쪽
"당신은 누구냐고 묻길래, 우리는 겁쟁이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더 참혹한 미래를 만날 자신이 없어 지금 여기서 싸운다고 말했습니다."

104쪽
행복이 지상가치가 된 오늘날의 삶은 점점 안락에 예속되고 있지 않은가. 충족해야 할 것은 안락이며 제거해야 할 것은 불쾌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짜증남이다. 기쁨은 다르다. 이곳 생활에서 기쁨은 안락에 머무르려는 심리적 타성과는 반대인 시도와 성취의 감정이다. ...... 기쁨은 인간의 여러 정신능력이 동반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감정이다. 아직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저 너머의 목표 지점을 마음의 시력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골짜기의 기복을 넘어서려는 극복의지가 생겨난다. 그 극복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인내와 갖가지 궁리를 필요로 한다. 기쁨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기에 시련의 대가로 성장을 선사한다.

115쪽
이곳에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신의 활동에 영감을 준 사람, 자신의 영혼에 자취를 남긴 그 사람으로 이야기가 번져간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가르친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운동을 가르치려 드는 선생이 없으며 타인의 활동에 대한 훈계도 없다. 하지만 배움이 있다. 상대는 가르친 적 없지만 자기 안에서 배움이 일어난다.

157쪽
제주사람은 제주사람이라서, 마을주민은 마을주민이라서 그 자연과 땅을 지켜야 할 의무 이상으로 처분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 천막촌에는 여러 제주사람이 있으며, 제주와 사람 사이에는 여러 문장이 있다.

198쪽
평등과 대등. 이곳에서 평등과는 다른 대등을 사고하게 된다. 만약 평등이 자격이나 지위의 동등함이 전제된 관계의 수평성을 뜻한다면 대등은 각각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성취된다. 
같아서가 아니라 달라서 대등할 수 있다. 상대와 나는 다르지만 상대의 의지와 욕망을 자신의 그것만큼 존중하는 것, 또한 상대의 능력과 노력이 자신의 그것과 더불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 이러한 대등화 과정은 민주주의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177쪽
이곳에서는 문제가 생긴다. '생기다'는 '벌어지다'이자 '얻다'로 풀이할 수 있다.

198쪽
권력과 맞서고자 한다면 우리 안의 권력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국가와 맞서고자 한다면 우리 안의 국가를 없애야 한다.

246쪽
옳은 말은, 옳기만 한 말은 올바로 작동하지 못한다. 논리와 비판에 치중하는 말은 적을 상대하기에는 유용하나 동료에게는 실패할 수 있다.


177쪽
마지막 음표가 노래의 목표가 아니듯 결론만이 논의의 목표는 아니다.

 

261쪽
절망과 희망의 관계가 그러하듯 패배는 승리의 반대말이라기보다 승리가 자라날 토양이다.

 

260쪽
"질 때 지더라도 잘 져야겠다." 천막촌에서 종종 듣는 다짐.


254쪽
무엇보다 운동의 성취를 말한다면, 그건 참여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변화일 것이다. 누군가가 더 이상 운동 이전으로 돌아가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자체가 변화이고 운동의 성취다. 누군가가 이 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궁리 중이라면 그 꿈을 꾸게 한 것이 운동의 성취다. 구체적인 정책이나 제도를 변경하기 이전에 그것들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와 심성과 정신이 달라지는 것이
운동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성취다.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다르게 살고 있으며 살려고 한다는 뜻이다.


172쪽
비슷해서 함께 있는 공동체共同體​가 아니라 다르지만 함께 하는 공동체共動體.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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