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19쪽
그러나 사회는 노년의 삶을 위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 테레즈는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사는 것의 연장일 뿐이라고. 여기저기 아픈 곳을 얘기하며 자식들에게 투정이나 부리다가 죽음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는 대신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갖는 것,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온몸을 다해 투쟁하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찬 시민으로 살다 가는 것"이 테레즈의 꿈이자 그녀가 바바야가의 집을 통해 실현하려고 하는 목표다.

24쪽
피임약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여자들은 임신의 기쁨을 누리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임신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말하지도, 활자화하지도 않았던가?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낙태를 해야 하지만 낙태가 여전히 불법이었으니, 그녀들은 엄청난 비용과 건강상의 위협이라는 두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다. 

38쪽
무한히 열려 있는 선택지 앞에서 원한는 것을 고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병은 네 개 중 하나의 정답, 그것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가 아니라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를 추정하는 훈련만 무수히 해온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병이다.

54쪽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경우 그만큼 본전을 뽑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어서 자기 방식대로 충분히 여유를 갖고 보지 못한 채 다리가 아프도록 최대한 많이 보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무료로 입장을 하니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관람을 하게 되었다. ...... 나는 산책 삼아 루브르박물관에 가기도 하고, 거기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리란 기대로 가기도 했다. 

74쪽
아들에게 "부모의 뜻을 거스를 때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매일매일 너는 부모의 마음에 안 들게 해야동해야 한다. 그렇게 구축한 네 모습을 나는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89쪽
현대인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 돈을 벌고, 직업을 벗어나는 모든 영역에서는 한없이 무능해져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사실이 어리석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과연 원시인에 비해 더 유능하고 현명한 인간일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면서 나는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자립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으로 서서히 전환하게 됐다.

114쪽
기 드보르Guy Debord가 "우리는 결코 일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한 방식의, 돈을 벌기 위한 강제적인 의미의 '일'을 갖는 것에 대해 솔렌은 저항하기로 다짐한다. 월급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 우리를 길들이는 가장 무서운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또한 자신이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하는 배부른 이야기일지 모른다며 자기 검열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차곡차곡 나오는 월급을 받기 위해 버둥대며 노력하지 않겠다"라고.

113쪽
좌파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현상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방향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반대만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그 반대하는 대상의 힘을 키워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지평으로의 가능성을 찾다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 이것을 다양화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문제로만 접근한다면 단 한 가지의 투쟁에 몰두하게 된다. 이건 아주 전형적으로 위험에 빠지는 방법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114쪽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그의 사촌형은 저소득층을 위한 보조금RSA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여전히 제국주의자 행세를 하며 그들의 피를 빨아대는 프랑스를 고발하는 전방위활동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월급의 노예가 되어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은 최소한으로 국가로부터 받아 쓰면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활동가로서의 글을 쓰고 있다. 

122쪽
이예다. 91년생. 2년 전 여름 파리에 처음 왔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사유로 프랑스에서 난민 자격을 획득한 첫 한국인이다. ...... 더불어 병역 거부가 난민 허가의 사유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환기시킬 수 있다면 군대를 당연한 의무로만 생각하던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닐까.

124쪽
고등학교 때 친구와 선생님을 통해 정치의식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이러저러한 집회에도 참가했다. 거기서 의경을 보았다. 그들이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보면서 군대라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미국을 위해, 우리와 상관없는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게 내가 본 우리 군대였다. 나라를 지킨다기보다는 권력자를 위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하는 조직이라고 보았다. 거기서 총을 들고 죽이는 훈련을 받는다는 것, 군복무를 거부하면 범법자로 취급당하고 감옥에 가야 한다는 그 폭력적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38쪽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엠마누엘은 줄곧 '난민'이란 존재에 강하게 이끌렸다. 뿌리째 뽑혀 자기 땅을 떠나온 삶,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삶들에 대해 그녀가 느끼는 그 강렬한 감정은 합리적 설명을 거부하는 야릇한 태생을 가졌다. 

176쪽
각자의 입맛에 맞는 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들은 흔히 돈을 버는 직업과 열정을 바치는 협회 활동에 동등한 에너지를 쏟으며 산다. 사람 셋만 모이면 협회 하나가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을 만큼 수백만 개의 협회가 존재하고, 그것이 삶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확대, 분산한다. 이것이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를 사회 구석구석에 확산시키며, 개인의 행복을 증폭시키는 프랑스식 생활 방식이다.

204쪽
(당신에게 좌파는 어떤 사람인가?) 다른 먼지들이 진정한 자유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나'라는 먼지만 홀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210쪽
프랑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이는 69세다. 의무는 사라지고, 오로지 하고 싶은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이 주어지는 시기가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235쪽
쥘은 적극적으로 아이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가족 이기주의에 빠질 것을 염려하기도 하거니와 이토록 모순된 세상을 변화시켜놓지도 못한 채 새로운 생명을 다시 모순된 세상에 던져놓는다는 것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260쪽
한국이 감히 통일을 말하고자 한다면 북한을 구축하는 중심적 정치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를 인정하고, 공산당을 지금의 새누리당 같은 정당으로 인정하여 적어도 제2 야당 정도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할 때라야만 가능하다. 남한의 인구가 북한보다 훨씬 많으니 비례의석을 각각의 의회에 배분하는 정도의 배려와 양보를 하지 않고서는 통일을 말할 자격이 없다. 유럽을 보라.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대륙이지만 공산당이 없는 나라가 없다. 공산당이 자체적으로 힘을 잃어 소멸하면 모를까, 강제적으로 그 정치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 전쟁밖에 더 있겠는가.

272쪽
나는 빈 라덴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형이라 생각한다. 그는 억만장자인 데다 사회적 지위도 높고 수많은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간단히 물리고 투사로 살기를 택했다. 아프가니스탄 골짜기에서 소련도 어쩌지 못한 미국을 상대로 무력 저항을 했으니 놀랍지 않은가.
빈 라덴을 왜 투사가 되었을까? 분노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소련을 내쫓으면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국가를 세우는 데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빈 라덴 일가는 미국 정부의 말을 믿고 앞장서서 그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의 믿음을 철저하게 배반했고 빈 라덴은 반미투쟁에 투신했다.
...... 북한이 3대 독재 세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는 있지만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들을 높이 평가한다.


[네이버 책] 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파리의 생활 좌파들

국경을 넘어 21세기 좌파를 말하다!민주노동당에서 일했던 저자는 격렬했던 한국의 좌파들의 모습을 목격해왔었다. 하지만 그 격렬함만큼 빠르게 좌파 되기를 내려놓고 다른 길을 떠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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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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