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인류학자 - 올리버 색스


28쪽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종종 자연의 상상력이 인간의 상상력보다 훨씬 풍부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물질계와 생물계의 풍요로움, 물리적 형태와 생명체의 끝없는 다양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의사인 내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자연의 풍요로움건강과 질병읜 측면, 인간과 인간이 만든 조직들이 인생의 도전과 변화를 맞닥뜨렸을 때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적응하고 스스로 재건하는지의 측면에서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결함, 장애, 질병은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더 잠재적인 능력,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로 인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78쪽
그런데 I씨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변화는 사고 후 몇 달 동안 그를 괴롭혔던 엄청난 상실감과 불쾌감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는 색맹이 된 현실을 인정했고, 어느 정도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색으로 얼룩지지 않은 순수한 세상을 '정제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권'을 누리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색에 가려져 일반인은 느낄 수 없는 미묘한 질감과 무늬가 그의 눈에는 아주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혀 새로운 세계'를 선물 받은 셈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색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색맹이라는 별난 선물이 그를 새로운 감성과 생존방식으로 인도했다고 생각한다.

82쪽
지난 10년간의 연구 결과, 대뇌피질이 얼마나 유연한 조직이며, 부상당하거나 마비를 일으키거나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거나 전혀 사용하지 않을 경우 대뇌의 신체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가 밝혀졌다. 예를 들어 점자를 읽을 때 계속 한 손가락만 쓰면 대뇌피질에서 해당 손가락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비대해진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청력을 잃어 수화를 쓰게 되면 청각피질이 시각 정보 처리에 동원되는 등 대뇌의 구조가 대폭 달라진다. I씨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게 기존의 상징과 의미체계가 모두 소멸되고 전혀 새로운 체계가 등장했다.

132쪽
그런데 투렛증후군의 경우에는 질병과 환자, 즉 '그것'과 '나'의 관계가 한결 복잡하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투렛증후군을 겪은 환자는 모든 방면에서 '나'와 '그것'이 뒤엉키기 때문에 더더욱 복잡해진다. 투렛증후군과 환자가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보완하며 적응하다 결국에는 백년해로한 부부처럼 단일복합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보통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가끔은 속도와 자발성과 능력을 배가시켜 놀라운 성과를 거두며 건설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참견대장 격인 투렛증후군을 창조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157쪽
내가 아는 한 성격파 배우는 무대 뒤에서 극심한 투렛 증상을 보이다가도 연기만 시작되면 투렛증후군을 완전히 잊은 채 배역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심리학이나 신경학 용어로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특정 행위가 지속되는 동안 또 다른 자아가 육체적으로 구현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자아의 기술과 감정과 신경계의 잠재 기억이 두뇌를 장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하루를 사는 동안 역할이나 임무가 바뀔 때마다, 즉 무대가 가정에서 직장, 정치적 색정적 상황 등으로 바뀔 때마다 이와 같은 정체성의 변화와 재편을 겪는다. 하지만 신경질환 혹은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이나 예술가, 배우의 경우에는 변화가 한결 극적이다. 

193쪽
시각장애인은 촉각, 청각, 후각으로 이루어진 순차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세계를 건설하기 때문에 정상인처럼 눈으로 동시 인식을 할 수 없다. 한꺼번에 펼쳐지는 광경을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9쪽
그는 백내장 수술을 받고 두 달이 지났을 때, 사진이 표면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한 물건이 아니라 입체적인 물체의 상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진 속 물체에서 아무 감촉도 느껴지지 않자 깜짝 놀라면서...... 촉각과 시각,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진짜냐고 물었다.

202쪽
그는 눈으로 캥거루의 움직임을 좇으며 유심히 관찰했지만, 손으로 만져보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버질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 걸까? 아니, 버질에게 '본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일까? ......
우리는 동물을 직접 만지고 싶어 안달이던 버질에게 동상이라도 만져보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동상을 꼼꼼히 더듬으며 전과 다르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시각장애인이던 시절에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독립적으로 살았는지, 두 손으로 얼마나 쉽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경험했는지, 우리가 지금 얼마나 그를 몰아세우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손쉬운 방법을 버리고, 어렵고 낯선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210쪽
뒤늦게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버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시각과 촉각의 불안정한 관계였다. 손으로 더듬어야 할지 눈으로 보아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 우리를 만난 날에도 교구에서 손을 떼지 못했고, 동물들을 만지고 싶어 안달을 했고, 포크 사용을 포기했다. 그의 표현 방식과 모든 감각과 세계관은 촉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는 수술을 받기 전까지 철저하게 촉각에 의존하던 사람이었다.

213쪽
시력을 회복한 사람이 보는 법을 배우려면 신경 기능상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와 함께 심리적인 기능, 즉 자아 정체성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문자 그대로 생사를 건 싸움이다. 발보는 "정상적으로 앞을 보던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해야 시각장애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어느 환자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반대 경우에도 적용된다. ...... 실명이 처음에는 엄청난 고난과 상실로 다가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 혹은 방향 재설정을 통해 시각이 사라진 세계에 다시 자리를 잡으면 상실감은 조금씩 사라진다. 그러면 나름의 감각과 조화와 감정을 갖춘 '또 다른' 상황, 또 다른 존재 형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252쪽
우리는 기억을 과거의 기록이나 저장으로 간주하는 발상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얼마나 논란의 여지가 많은지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평범'하고 분명한 일상의 기억들이 생각할 때마다 가물가물하며, 조금씩 달라지는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만 모여도 말이 다르고, 어떤 사건, 어떤 기억이건 시시때때로 내용이 바뀐다. 프레드릭 바틀릿Frederic Bartlett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야기 되풀이하기와 그림 기억 실험을 통해, '기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한다'는 과정만 존재한다고 결론 내렸다(명저 <기억하다Remembering>에서 그는 명사를 피하고 동사만 쓰느라 진땀을 흘린다).

282쪽
1940년대 들어 처음으로 자폐증이 학계에 보고되면서 백치천재들은 대부분 자폐증 환자이고, 자폐증 환자 가운데 백치천재가 차지하는 비율(거의 10퍼센트에 육박했다)은 정신지체 인구에서 백치천재가 차지하는 비율의 200배, 전체 인구에서 백치천재가 차지하는 비율의 수천 배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자폐성 천재들은 음악, 기억력, 시각예술, 암산 등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290쪽
스티븐은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지만 완성된 작품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가 찾아보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거나 책상 위에 그대로 있기 일쑤였다. 

318쪽
백치천재는, 지능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각각의 지능이 잠재적인 수준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353쪽
자폐증 환자는 닮은꼴이 없다. 각 사례마다 정확한 상태나 증상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자폐성 특징과 기타 개인적 특성들이 아주 복잡하게(그리고 독창적으로) 상호작용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한번 흘끗 보기만 해도 진단을 내릴 수 있지만, 자폐증 환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으면 일대기 정도는 알아야 된다.

397쪽
그녀는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고(정상인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만, 자폐증 환자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흔한 일이다) ......


[네이버 책] 화성의 인류학자 - 올리버 색스

 

화성의 인류학자

뇌신경 손상으로 인해 기이한 내면세계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갖게 된 일곱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 세계적인 신경학자이자 뛰어난 글쟁이인 올리버 색스는 자신이 담당했던 환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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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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