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 없는 출산 - 목영롱


33쪽
출산이라는 너무도 위험하고 중요하고 사적인 사건 앞에서 나의 몸이 나의 이해나 통제가 미치지 않는 '낯선 영역'이 된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전문가 집단에 의해 독점된 출산의 언어와 절차를 쉬운 말로, 그리고 누구나 이해 가능한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고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35쪽
모든 인간의 절대적 존엄성에 대해 예민하고 세심하게 반응하고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회가 진보된 사회다. 그러나 우리는 진일보한 것으로 보이는 문명사회를 살아가면서 실은 너무도 무지하게 살아가고 있다. 인간 종(種)의 고통에 너무도 무관심하다. 웬만한 고통에는 "그 정도는 참아야지." "견뎌라, 그러면 좋은 날이 올 거야."라고 말한다. 고진감래 류의 가학적 말이나 "나도 겪었으니 너도 겪어라."는 식의 말만 가득하다. 그러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 고통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악을 재생산할 뿐이다.

44쪽
결국 영원 같던 시간이 흘러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진통이 끝나고 아기가 세상으로 나왔다. 아기가 나오자 세상의 모든 관심은 아기에게 쏠렸다. 나는 그저 '부상자'로 뒤에 남겨졌다.

47쪽
엄마에게 요구되는 사회의 시선과 기대는 교묘하고 조직적이며, 대개 이 요구들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48쪽
나는 인간이지 '여자'가 아니었다. ...... 그런데 임신과 출산은 머리를 후려치며 "너는 여자야."라고 말해주었다.

51쪽
임신과 출산에 이르기까지 느꼈던 나의 감정들을 털어놓을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아기가 태어난 이상 그간의 과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65쪽
살아 있는데, 자극이 오면 아픈데, 어떻게 '가만히'만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시체가 아닌데 홀랑 벗은 채로 타인의 '찌푸린' 시선 앞에서 그 어떤 감정의 요동이 없을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한 이를 나무라는 태도가 내게는 폭력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정녕 내가 시체이길 바랐던 걸까? 감정을 없애고 움직이지 말라는 요구,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몸에 대한, 모든 것을 자각하는 감정에 대한 일종의 혐오다.

77쪽
의사는 임산부의 무질서해 보이는 신체증상, 변비, 치질, 과체중, 출혈 등이 산모의 노력 부족이나 무신경, 부주의, 컨디션 관리 부족, 심지어 게으름 탓이라고 여기며 쉽게 비난한다.

83쪽
대학병원이 지닌 '교육'이라는 목적 때문에 산모들은 자신의 신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게 되는 고통을 감내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람다움을 포기해야 하는 역설을 경험하는 것이다.

88쪽
출산은 의료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자본의 논리, 출산에 대한 철학, 사고방식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결정된다. 한마디로 출산은 '문화'에 가까운 것이다. ...... 그런데 조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의 의료가 생명을 존중하는 쪽보다는 효율이나 비용 문제에 영향을 더 받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46쪽
그런데 좋은 엄마는 또 좋은 딸이자 좋은 며느리, 좋은 시어머니, 좋은 장모로 스펙트럼이 무한 확장된다. 다중이가 아니고서야 이 많은 역할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지만 어느 날 당신이 저 다양한 역할 때문에 긴장, 갈등, 혼란, 무력감, 불안, 우울, 정신적 피로 등을 느낀다고 털어놓는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은 '이상한 엄마'가 될 것이다.

152쪽
출산에 관한 정보가 이렇게나 마구잡이인 것은 출산의 주체가 출산이란 경험을 해석하는 권한을 부여받지 못해서 지식으로, 역사로 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153쪽
현재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출산은 오직 여성의 신체, 임신, 출산 과정을 생물학적, 해부학적, 의료적 측면에서 단편적으로 다룬 것이 주를 이룬다. 출산의 계보학, 철학, 심리, 문화, 이데올로기, 출산과 미디어와의 관계 등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여성의 출산 역사, 출산 정보, 노하우 등이 제대로 업데이트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은 여성들이 개인의 출산에 대해 입을 닫는 대신 손자들이 할머니의 출산을 영웅담처럼 떠드는 모순을 야기한다.

165쪽
저출산이 심각한 문제라는 프레임은 국가적 입장에서의 상황 인식을 마치 보편적 진리인 것처럼 둔갑시킨다. 그 결과 일상생활의 가장 친숙한 영역으로 이 의식들이 침투하여 개인의 신체 관리 권력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171쪽
누군가를 짓밟고 만들어진 농담은 그래서 더 예민하고 집요하게 '죽자고 매달려' 비판해야 한다.

176쪽
'열정 페이'라는 말이 청년층에게 또 하나의 억압이듯 '경험 페이'는 노년층에게 억압이고 굴레다.

187쪽
출산 기술의 의료화가 여성의 임신에 도움이 되고 유용할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적 전망은 여성이 느끼는 고통과 감정의 문제를 은폐시킨다.

188쪽
나는 '불임'이라는 언설 자체도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자궁을 가진 모든 여성이 출산을 해야 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의 일부는 원래 불임이다. 불임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질병'으로 받아들일지의 문제는 의료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다.

204쪽
산부인과 질병이 있는 경우와 임신과 출산으로 산부인과에 가는 것은 결코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 의료에서 출산은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출산이 의료가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 그런데도 산부인과 의사는 산모를 환자로 '만든'다. 감시, 관리,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 산모를 기계적으로, 정서적 지지 없이 대한다.

217쪽
출산은 매우 정신적인 일이다. ...... 하지만 병원 환경은 산모의 정신적 신체적 정서적 편안함과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 출산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일이라는 인식 자체가 전무하다. ...... 혹독한 산통 중에 겪는 총체적(신체적, 감정적) 어려움이 결국은 산모의 건강을 크게 훼손한다. 이후 산모를 괴롭히는 산후우울증으로, 교란된 신경계증상으로, 산후풍 등으로 나타나 여성의 출산 이후 일생에 커다란 후유증을 남긴다.


114쪽
남편은 나의 우울증상에도 불구하고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을 의아해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삶이 모욕적이기에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열심히 산다. 어쨌든 그날 나는 남편에게 애도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지금 막 나는 출산에 관한 슬픈 기사를 보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남편은 내게 "당신이 하고 있는 그 글쓰기가 당신을 더 다크하게 만들 뿐이야."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예수야? 왜 세상의 온갖 짐을 당신이 지려고 해?"라고 말했다.
나는 감히 세상의 짐을 지려고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이 나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세상의 온갖 슬픔과 기겁할 '악'의 소행들을 매일 보고 겪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이들이 정말로 이해 불가다.


[네이버 책] 굴욕 없는 출산 - 목영롱

굴욕 없는 출산

『굴욕 없는 출산』은 차별받지 않고 살았다고 자부했던 평범한 30대 후반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게 되었는지를 당당하고 솔직하게 밝힌 일종의 ‘전

book.naver.com

Posted by 몽자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