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김찬호가 <모멸감>에 썼다. "돈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고 해도 내어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 목록이 길수록 잘사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100억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 나는 어떤 것으로 목록을 채울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렇게 노래를 불러 왔다. '배우자는 100억 줘도 안 바꾼다!' 여전히 같은 마음이다. 수차례, 몇 년간 생각해 온 터라 당연하고 확고한 '사실'이다. 더할 나위 없이, 복이다. 가끔 생각한다. 이리도 큰 복을 받았기에 다른 복은 씨가 마른 것인가. 벅차고, 어리둥절하고, 허하도다!

 

김찬호는 목록이 길수록 잘사는 사람이라 했지만 개수보다 의미, 삶의 행복을 좌우하는 크기가 더 중하지 않을까. 그래도 달랑 하나는 좀 아쉽긴 하다. 그래, 몇 개나마 늘려보자. 내어주고 싶지 않은 것이 될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거다. 일명 리스트 조작. 도전과 좌절을 반복하고 있는 네 가지를 '내어줄 수 없는 것'으로 끌어올려 보려 한다. 12월을 맞아 올해 초 2023년의 목표로 세운 바를 되돌아본다. 짜잔. 만보, 일기, 영어, 드럼!

 

작년에 300만 원 가까이 들여 몇 달간 헬스트레이너에게 PT를 받았다. 난생 처음. 버킷리스트였고, 미친 척 질렀다. 돈 주고 산 경험은 나쁘지 않았다. 만족할 만한 몸을 만들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길 잘했다 생각한다. 내 몸이 웨이트 운동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식습관에 대한 트레이너의 조언이 내 일상에 얼마나 불필요한지, 매일 헬스장 출석을 강요 받는 상황에서 하루의 땡땡이가 어떻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소상히 경험해볼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 의미를 되새겨볼 즈음 만난 <걷는 사람 하정우>. 웨이트에서 만보 걷기로 냅다 갈아탔다. 1월부터 도전한 '하루 만보'는 오늘(12월 5일)까지 '하루 7326보'라는 형편없는 점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걷기의 유쾌함은 충분히 맛보았기에 내년에도 이어갈 참이다. 

 

일기는 아직 어색하고 어렵다. 10년 전 블로그 포스팅에 열을 올리던 때를 생각하면 어색하다는 게 어색할 지경이지만, 쓰는 작업은 물론 쓸 시간 내는 것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변화에는 굳은 다짐보다 좋았던 기억이 더 큰 원동력이 된다고들 한다. 쓰고 나서의 기분, 쓰는 하루하루가 반복될 때의 일상에서 받는 알찬 느낌을 기억한다. 죽을 때까지 만끽할 수 있길 기대한다. 노후 대비 수단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매일의 도전으로 두고 볼 일이다. 열패감을 애써, 눌러 본다.

 

치매 예방, 실감나는 미드 시청, 학창시절부터의 고질적 과제 물고 늘어지기 등 '영어 공부 놀이'를 계속하는 이유는 '쌨다'.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은 아니다. 항상 음악을 틀어놓는 편 또한 아니다. 그런데 드럼 소리에는 죽고 못 사는 편. 음악을 좋아한다기보다 드럼이 쥐락펴락하는 음악에 열광한다. 음악 속 드럼 소리에 흥분을 주체 못한다면, 그렇다. 내 손과 발로 직접, 그 소리를 내봐야 한다. 휴대성은커녕 접근성 또한 최악인 악기이지만 나를 소름 끼치게 하는 소리를 듣기만 하는 데 그치는 건 내 '취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소름은 의지, 계획,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나를 소름 끼치게 하는 것, 그 존재를 돌보고자 한다.

 

억만금을 제시해도 어림없는, 내가 가진 소중한 존재의 목록을  만보, 일기, 영어, 드럼에 대한 나의 애정으로 채우리라. 격렬하고 화려하며, 여럿이서 짜릿한 팀워크를 경험할 수 있는 오만 가지 운동을 다 제치고 걷기를 인생 운동으로 삼는 취향. 곧죽어도 써보겠다며 사소한 생각이나마 부여잡고 의미를 부여해대는 고집. 매일 마시는 소주가 인지기능저하 장애를 부른다면 영어 공부로 이를 막아보겠다는 천연덕스러운 전략. 듣고 또 들어도 드럼이 뿜는 진동에 무장해제되는 심장. 이 네 가지가 나, 내가 이 네 가지다. 살맛, 이렇게 챙겨 본다. 

 

2020년 6월 21일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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