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 - 요조(신수진)


56쪽
아주 모범적인 맨스플레인mansplain*을 당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단어.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130쪽
그날 저녁 나초와 에디뜨를 데리고 한국식당에 데려가 한국 음식을 대접하면서 더듬더듬 영어로 내 마음을 말했다. 두 사람은 고맙게도 정말 기뻐해주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이렇게 우리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친구가 된 것이 너무 기뻤다. 맛있어요, 오늘 기분 어때요, 좋아요, 매워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더듬더듬 마치 개미처럼 머리를 가까이 대고, 눈을 마주보며 입모양을 보며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144쪽
나와 같이 틈나는 대로 한숨 쉬는 서점 주인들의 얼굴에서도 보이던 그것. 힘들어요, 힘들어요, 하는 그 어두운 얼굴 틈에서 작게 빛나는 '단호한 행복'의 빛. 만날 때마다 걱정하고 염려하다가도 헤어질 때는 안심하게 하는 그 빛. 나는 "같이 사진 찍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세사람의 '단오한 행복'의 빛을 기록해두었다.

153쪽
내가 책방을 하면서도 신기하다고 여기는 부분이 또 있다. 책방에 있는 책들이 골고루 팔릴 것 같지만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굉장히 많다. 예를 들면 계속 시집만 팔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사진집만 팔리는 날이 있고, 인기가 없어 책방에서도 신경을 두지 않던 특정 책을 오는 손님마다 찾을 때도 있다. ......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두 가지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혹은 SNS의 영향으로 인간들은 비슷비슷한 하루를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인간들은 비슷비슷한 하루를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 ...... 아무튼 나는 책방에서 한결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남들과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일체의 욕심을 버렸다.

157쪽
책방에 와서 "뭐하는 책방이냐"는 한심한 질문 좀 안 했으면 좋겠다.

169​쪽
5년 뒤면 나는 41살이 된다. 어떻게 살고 싶지? 그때도 '책방 무사'를 하고 있을까, 아니, 할 수 있을까? 다른 일을 하게 될까? 그때까지 나는 뮤지션으로서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 징그러운 생각들. 이놈들 간만에 물 만난 듯이 펄떡펄떡거리고, 내 마음은 금세 뭔가로 휘저어서 혼탁해진 음료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음료는 이렇게 혼탁하게 해서 마시는 게 정상이다.

184쪽
썰물 때라 그런지 바다는 멀리 놀러 나가고 없었다. ...... 놀러 나갔던 바다도 돌아왔는데 밤이라서 보이지 않았다. ...... 그리고 우리는 다시 조개를 먹고 조개를 먹고 조개를 먹었다.

191쪽
나는 그렇게 가지런히 놓인 내 책방의 책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이런 책들을 대거 입고하다니, 내가 요즘 이 문제에 관심이 많구나' 'A작가의 책이 갑자기 늘어났네. 내가 요즘 이 작가에 관심이 많구나' 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다가 책방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이곳은 정말로 나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잘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 내 책방도 좋은 곳이 될 것이다.

199쪽
누군가의 집에 우연히 놀러 갔다가 자기 취향의 책들만 꽂혀 있는 서재를 발견하면 그 사람과 덜컥 친해지고 싶은 기분이 들듯이 곧장 이 책방과 친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조용히 속으로 감탄하던 사이 책방에는 동네 단골들이 하나둘 들어와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길에서 구조한 것으로 보이는 새끼 고양이가 들어 있는 라면박스를 둘러싸고는 소곤소곤 고민을 나누더란다. 고즈넉한 저녁, 작고 편안한 어느 공간에서, 누군가는 조용히 책을 보고 누군가는 작고 연약한 다른 존재를 걱정하는, 그 옹기종기함이 새삼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226쪽
그녀가 고른 몇 권의 책과 함께 달력을 포장하면서 카드를 몰래 넣었다. 얼마 뒤 손님이 다시 책방에 찾아왔다. 놀라움과 감사가 뒤섞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런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 이렇게 만들어놓고 싶어. 

244쪽
마침 내가 2집 <나의 쓸모>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2집 작업을 하면서 내가 그다지 한국 음악 신scene에서 별로 쓸모가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는데, 거기서 묘하게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우리 모두 쓸모없는 먼지가 되어 자유롭게 우주를 떠다녀보지 않겠느냐는 쓸모없는 말을 하고 내려왔다.

246쪽
그날 나는 내가 읽었던 페미니즘 도서 몇 권을 내 옆에 쌓아두고, 멋있는 핀마이크를 차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책을 팔았다. 그리고 돈 대신 다른 것을 받았다. 여러분들의 소지품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을 달라고 했다. 생리대도 좋아요. 물티슈도 좋고요. 매니큐어는 잘 안 바르지만 주신다면 바를게요. 가져간 책들을 모두 팔았다. 나는 생리대도 벌고, 사과도 벌고, 막대 사탕도 머리핀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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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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