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쪽
가끔 남성 잡지를 읽는다. 일부러 사서 읽는 편은 아니고 카페에 비치되어 있는 것을 읽는 정도다. 패션, 라이프스타일, 여행, 예술, 자동차, 음식, 섹스... 잡지 속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온갖 관심거리가 들어 있어 읽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최신 트렌드를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아, 요즘은 이런 게 인기구나. 전혀 트렌디하게 살고 있진 않지만 트렌드 지식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기분이랄까. 그런데 흥미롭게 모든 섹션을 읽고 나서 잡지를 덮으면 이상하게 공허하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커피를 너무 마셔서 그런가? 아니다. 잡지를 읽는 내내 마주하게 되는 이런 문구들 때문이다.
"애써 꾸미고 싶지 않은 날, 무심하게 걸치기 좋은 블랙 카디건, 120만 원"
아아, 날 농락하고 있어. 정녕 백만 원이 넘는 카디건을 무심하게 걸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전에 카디건을 백만 원 넘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가능한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건 대중잡지가 아니던가. 대중이 공감할 수 없는 이런 문구를 적는 이유는 뭘까. 마치 이런 문구들은 “너 같은 사람이 공감하라고 적은 게 아니야."라고 말을 거는 것 같다. 아, 이 모욕감.
이런 모욕의 글들은 잡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볍게 들기 좋은 가방이 500만 원(어이, 가격이 가볍지 않다고). 자동차도 패션처럼 그날의 분위기에 맞게 바꿔 탄다는 자동차 애호가 인터뷰(가만, 나이가……… 너 스물여덟 살이구나). 시계가 많지만 아버지가 물려주신 롤렉스시계를 가장 아낀다는 젊은 사업가(이봐, 롤렉스를 차는 아버지를 둔 게냐). 이런 것들을 읽고 난 후엔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내 삶을 비교하게 되는데, 그러면 정해진 답은 하나다. '내 삶은 삶이 아니야, 이건 똥이라고.' 잡지, 나한테 왜 이러세요?
257쪽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엔 우리가 궁금해하는 잡지의 본질에 대한 힌트가 들어 있다. ...... 그렇다. 잡지의 목적은 읽는 이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좌절감은 고도의 계산된 상술이다.
20쪽
공들인 작업은 별다른 성과를 못 냈는데 대충대충 한 작업은 좋은 성과를 낸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22쪽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반드시 '이만큼'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괴로움의 시작이다. ...... 이처럼 노력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할수록 자꾸 억울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27쪽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경주'에 참가했었는데 지금은 그 경주를 기권한 기분이다. 경주에 참여하지 않으니 당연히 승리도 패배도 없다.
39쪽
내가 이 나이에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만의 가치나 방향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욕망하며 좇은 것들은 모두 남들이 가리켰던 것이다.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게 부끄럽다. 나는 열심히 쫓아가다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엎어진 사람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참에 나만의 길을 찾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제부터는 마이 웨이다.
61쪽
꿈을 이루기 힘든 세상을 보고 자란 이들은 꿈을 꾸지 않게 된다. ...... 그들의 꿈을 빼앗고 포기하게 만든 건 세상이다. ...... 그들은 결코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라도 인생을 살아 내고 싶을 뿐이다. ...... 지금 밖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뛸 사람은 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폭풍우가 그치면 더 많은 사람이 뛸 수 있다. 개인들을 닦달해서 폭풍우 속을 뛰게 만들지 말고 폭풍우가 잦아들어 뛰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먼저 아닐까?
70쪽
인생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통제가 안 된다. 자칫 허무주의로 흐를 수 있는 이 사실 앞에 나는 묘하게 위로를 받는다. 아, 모든 게 내 탓은 아니구나. ...... 나이가 들어서도 고민과 불안함은 계속되지만 뜨겁게 열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까지 고민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4쪽
자, 우리 힘내지 말고 힘을 빼자.
95쪽
그러고 보면 직장인들이 자신의 자유(시간)를 팔아 번 돈을 열심히 모으는 이유도 나중에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가 아닌가. 결국, 그렇게 힘들게 모든 돈은 다시 자유를 사는 데 쓰이게 될 테니 지금의 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130쪽
그럼에도 우리는 검색을 한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다. 나에게 딱 맞는 것을 찾아 도전하고 위험을 무릅쓰기보단 실패하지 않을 검증된 '중간 이상'을 택한다. 그렇게 점점 내 생각이나 감각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고 퇴화하여 어느새 나의 선택을 믿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져 더는 '나'의 취향이나 감을 믿지 못하고 선택권을 '남'에게 넘겨버린 지금의 우리. 고작 식당 하나, 영화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패할까 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인생은 오죽할까. ...... 모두가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갈 때 용기 있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인생을 살게 된다. 실패해도 좋다. 실패했을 땐 후회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남의 말만 듣고 우르르 몰려갔던 사람들 대부분도 후회하긴 마찬가지다. 안 그런가?
141쪽
너무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있다는 건 '성취'의 영역이지 '재미'의 영역이 아니다. 보라, 목표를 향해 낭비 없이 일직선으로 달려가 값을 치르고 물건을 사는 남자의 쇼핑은 효율적이지만 얼마나 재미없는가. 반면 여자의 쇼핑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가 원래의 목적도 잊고 마는 무아지경의 재미가 있다. ...... 여행은 계획을 이행하러 떠나는 미션이 아니다. ...... 여행을 떠나기 전 챙겨야 하는 준비물은 계획표가 아니라 '태평함'이 아닐까? 비즈니스도 아니고 놀러 가는 건데 태평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데이트도, 산책도, 여행도, 가능하면 인생도. 목적 없이 우아한 헛걸음으로...... 즐거움은 그럴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178쪽
내 직업이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니 좋겠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응? 내 의견은 듣지도 않고?
182쪽
노동이 그렇게 가치가 있고 신성한 것이라면 자본가들은 왜 일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더 잘살고, 더 힘이 있고, 우리를 하대하는 걸까? ...... 현실이 이러니 노동이 신성하다, 가치 있다 찬양하는 건 노동자들을 더 값싸게 부려먹으려는 자본가계급의 세뇌 교육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아니면 노동자들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소리거나. 아차,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188쪽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남의 밑에서 월급 받는 게 참 쉽지가 않다. 한마디로 치사하다. 정녕 돈은 이렇게밖에 벌 수 없는 건가. 좀 더 자존감과 품위를 지키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고민이 여기까지 이르면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고 나발이고 쌓아온 경력도 다 버리고 '내 일'을 하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 요즘 한국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전 국민이 진로 탐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우리는 대학 입시와 취직이라는 한 가지 길로 내몰렸다가 또다시 자영업이라는 한 가지 길로 내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한국 사회는 다양성이 결여된 정답 사회다.
239쪽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한다고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차피 결과를 알 수 없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낫다. 남들의 인정에 목매지 말고 자기 세계에 집중하다 보면 그 세계가 더 단단해져 결국은 사람들도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끝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하고 싶은 걸 실컷 했으니 남들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만 하다 끝내 인정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273쪽
긴 사연과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을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이야기를 무시한 대가는 이처럼 냉혹하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롱과 경멸이 자리하게 된다.
285쪽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이 명언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다. 꼭 누굴 이기고 싶어서 즐기는 건 아니다. 그냥 재미있게 살고 싶은 거다. 누굴 이기는 게 목적이 되는 순간 절대로 즐길 수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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