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목욕탕과 술 - 구스미 마사유키


59쪽
이 목욕탕, 평일은 오후 세 시 반부터 문을 열지만 주말은 한 시 반으로 앞당긴다.

59쪽
끽연실이 있다.
담배를 혐오하는 이 세상에서 치요노탕은 애연가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휴게실에서 안쪽 코너로 나서면 그게 바로 끽연실이다.
대다수의 끽연실이 그러하듯 '아직도 담배 피고 싶은 놈은 거기 갇혀서 피워보든가' 하고 버린 자식 취급하는 폐쇄공간이 아니다.
테이블과 나무 의자가 놓였고 작은 정원에는 푸른 나무도 있다. 담배 피는 사람이 부러워 보일 정도로 개방적인 공간이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치요노탕. 만세!

67쪽
나는 만화나 음악을 대하며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일에서 '멋', '돈', '지혜'를 바라서는 재미없다고.
만화잖아. 노래잖아. 읽는 순간, 듣는 순간 잠시 즐기면 그만이잖아.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기껏해야 만화가인걸! 딴따라인걸!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뭐, 돈까지 벌려고 하는 건 비겁하지. 이런 일로 돈을 벌게 될 때는 그 시절의 우연이 겹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보라도 좋아. 아니, 바보이기에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거다. 남을 즐겁게 하고 약간의 대가를 받아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은 스스로 비렁뱅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마실 때만큼은 일도 피로도 잊고 마음을 푹 내려놓고 싶어서 술집으로 들어선다.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과잉 서비스, 넘치는 맛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70쪽
'찌개는 두 명부터 가능합니다'라면서 1인분 가격만 적어 놓은 가게도 어쩐지 교활하다. 
...... 술은 맥주, 사케, 위스키뿐, 소주는 없다. 요즘 세상에 이것도 희귀하다. 시대에 아부하지 않는다. 

127쪽
그렇지만 샤워만 하는 건 정말 싫다. 관처럼 좁은 욕조라도 무조건 몸을 담가야 한다. 어깨까지 물 속에 푹 잠기게.
욕조에 들어가는 걸 싫어한다는 어떤 나라의 사람들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가능하다면 매일 밤 탕에 들어가고 싶다. 탕 안에서 재충전한다. 다시 태어난다. 재생한다. 새로운 숨을 쉰다. 샤워만 해야 하는 인생은 숨이 턱 막힌다. 부정하다. 썩어가는 것만 같아.
이렇듯 돈덴탕에서 씩씩거리며 목욕을 즐기는 나란 인간, 얼뜨기인가 아니면 벽창호인가.

128쪽
"어디 문 연 가게 없을까?"
이윽고 내가 속내를 드러낸다. '마시자'거나 '술'이라는 말을 바로 내뱉고 싶지는 않다.
술꾼이란 늘 이렇다.
결국 마시고 만다. 반드시 마신다. 술집이 보이지 않으면 편의점 주류 코너로라도 돌진하면서, 솔직하게 마시러 가자고 말하지 못하는 멍청이다.
"아, 저기 라면술집이란 게 있네요."
눈썰미 좋은 구리 짱.
"있네."
여전히 점잔 빼는 나.

176쪽
그건 그렇고,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장대비다.
집 안에 있을 때면 의외로 아니, 은근히 즐겁다.
바깥은 비가 좍좍 쏟아지는데, 포근한 이불 속에 파붙혀 있으면 묘한 안도감마저 어깨를 감싼다. 몇 살이 되어도 즐거운 일이다.
세상 모르게 퍼질러 누워서 '약 오르지' 하고 속으로 까분다. 누구를 향해? 그건 나도 모르지.

188쪽
먼저 사케가 나왔다. 호오, 술통에 담가 숙성한 기쿠마사무네다. 한 홉짜리 조막병으로.
술잔에 술을 따른다. 자작으로 마시는 게 좋다.
쪽, 마신다.
적당히 뜨거운 술이 목 안으로 흘러내리며 살짝 깃든 나무향이 코로 퍼져나간다.
술이 위벽에 부딪혀 스르르 흡수되는 걸 느낀다.
"아아, 역시 사케는 좋아."
서양 술에서는 결코 이런 맛을 느낄 수 없다. 쌀밥 먹는 인종의 술이다.
풍요롭고 부드럽고 은은하고 섬세하고 상냥하고 따스하고 성숙하고 조용한 술, 사케.
사계절이 뚜렷한 극동의 섬나라에서 태어난 술이다.
한가운데 후지산이라는 영산이 우뚝 솟은 이상한 나라의 술이다.

188쪽
메밀국수가 나온다.
소쿠리를 뒤집어서 그 위에 메밀국수를 올렸다.
왜 뒤집어,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왜 양이 적어, 그런 말도 하지 않는다.
배를 채우려면 어디 가서 라면이라도 먹고 오면되잖아.

204쪽
둔감한 나도 이윽고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특별한 맥주 맛을 즐기게 해주려고 목욕탕으로 데리고 간 거였어.'
돈이 없으니 손님에게 맛있는 걸 대접할 수는 없다. 그러니 목욕탕으로 안내한 다음, 싸구려 술집의 맥주를 몇 배나 더 맛있게 마시게 하려는 아이디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불평, 비판, 겉치레는 일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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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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