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 유현준


​32쪽
여러분은 어려서 한 번쯤은 <셜록 홈즈>라는 추리소설을 읽어 보았을 것이다. 홈즈는 '알리바이'로 범인을 잡는다. 가령 살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저녁 8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용의자들이 저녁 8시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낸 후 알리바이가 없는 자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처럼 똑똑한 주인공이 시계를 이용해 범인을 잡는 모습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시간을 지키고 시계를 이용하는 것이 멋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근대 시기 건축가는 시계탑을 단 건물을 짓고 작가는 소설을 써서 사회 시스템의 유지에 영향을 미쳤다.​

38쪽
요즘 학교에서 '짱'을 먹는 아이들은 축구를 잘하거나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학교에 축구하는 운동장과 공부하는 교실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을 못하는 아이들은 12년 동안 지옥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이다.

41쪽
똑같은 공간에서 12년을 지내는 아이들이 정상적인 인격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우리 아이들이 같은 반 친구를 왕따시키고, 폭력적으로 바뀌는 것은 학교 공간이 교도소와 비슷해서다. 학생들에게 생겨나는 병리적인 사회현상은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하다. 사람은 건축 공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학교에는 다양한 건물군과 다양한 모양의 마당이 있어야 한다. 몇 발자국만 옮겨도 변화하는 마을 같은 풍경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나게 해 주어야 한다.

50쪽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숭고하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평등을 획일화를 통해 이루려 한다. 평등은 다양성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만약에 내가 5천 원짜리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데 당신이 만 원짜리 수제 햄버거를 먹는다면 나는 기분이 나쁠 것이다. 우리 둘 다 똑같은 크기와 종류의 음식을 먹는데 가격만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만 원짜리 수제 햄버거를 먹을 때 내가 5천 원짜리 쫄면을 먹는다면, 나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각기 다른 두 종류의 음식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성은 행복의 가능성을 높인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학교 건물에서 공부한다고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 

96쪽
우리 중 누구도 '우울한데 엘리베이터나 타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 몇 십만 년의 경험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우리는 주광성 동물이 되었다. ...... 우리의 도시에는 보행자 중심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일인 주거는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인 이유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더 행복해지려면 도시 전체를 내 집처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보행자 중심의 네트워크가 완성되고 촘촘하게 분포된 매력적인 '공짜'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 건축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

109쪽
현대 도시가 삭막한 이유 중 하나는 도시의 건물에 중간 지대 역할을 하는 '사이 공간'이 없어서다. 사이 공간이란 한옥의 처마 아래 툇마루 같은 공간을 말한다. 툇마루는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고 외부 공간으로 나올 수 있는 곳이다. ...... 내부와 외부 두 가지 성격을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발코니 확장법' 때문에 발코니가 멸종됐다. 그래서 더 이상 건물의 표정이 없다. 마스크를 쓴 사람 얼굴 같은 유리창만 있다.

124쪽
모든 공간이 인공적으로 조절된 공간에서 지낸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름철에 땀 안 나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방에서 지내다가 땀을 흘리려고 다시 사우나를 찾는 것이 우리다. 우리가 지금 등산을 자주 가고 골목길 상권을 찾는 이유는 이런 자연이 있는 외부 공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 현대사회의 공간적 특징은 "변화하는 미디어가 자연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27쪽
도시가 좋아지려면 성공적 상업 가로, 미술관, 공원 같은 불특정 다수가 갈 수 있는 장소가 많아져야 한다. 그중에서도 상업 가로는 외부 공간과 실내 공간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공간으로, 도시만이 제공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 저층의 선형으로 적절하게 분포된 상업 공간이 도시를 걷고 싶게 만든다.

128쪽
선형으로 상업 가로가 조성되어야 사람들이 걸으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다. ...... 그리고 이렇듯 지역 간 차이와 경계 없이 하나로 소통되는 도시가 있는 사회가 살 만한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 도시는 반대로 대형 유통 회사와 자동차 회사에 유리한 공간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 지어졌고, 지어지고 있는 백 층 넘는 건물은 대형 유통 회사를 소유한 롯데 그룹과 자동차 회사인 현대차 사옥이다.

131쪽
골목길과 복도는 둘 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이지만 차이점은 골목에는 항상 변화하는 하늘이 있고 복도에는 늘 똑같은 형광등만 있다는 점이다. ...... 아파트에 사는 우리가 지금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을 만날 수 있던 사람 냄새 나는 골목길 같은 공간이다.

137쪽
골목길은 사람이 다니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익숙한 크기와 길이로 나누어진 사람 중심의 길이다.

178쪽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점은 과시를 하려면 쓸데없는 데 돈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생활필수품에 돈을 써서는 과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두루마리 휴지를 동창회에 들고 간다고 해도 아무런 과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귀금속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떄문에 과시가 되는 것이다. 씹어 먹을 수도 없는 다이아몬드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을 쓴다는 이야기는 돈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라미드 같은 건축도 쓸모가 없어서 과시가 되는 것이다.

179쪽
미국은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에는 초고층 건물을 짓지 않는다. ...... 오늘날 우리가 피 같은 세금으로 국방비를 쓰는 것은 고대에 피라미드를 지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196쪽
건축은 종교를 강화하는 장치지만 텍스트인 경전은 종교의 전파에 효율적인 미디어다.

206쪽
반면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시선 집중을 받는 무대가 객석보다 아래에 위치한다. 이로써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무대로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지만 동시에 내려다보면서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왕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일반 국민도 언제든지 시선 집중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고 평등한 권력의 공간 구조를 제공하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그리스 민주주의 사회를 완성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 그리스는 인류 역사 최초로 객석과 무대로 구성된 극장을 만듦으로써 시민사회를 완성했다.

208쪽
우리는 정치 집회를 할 때 주로 광화문 광장에 모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적 중심축은 '이순신 동상 - 세종대왕 동상 -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축선상의 중심 공간이 광화문 광장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집회는 단순히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는 의미를 떠나 권력의 중심축을 누가 점유하고 있는냐를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 행위다.

209쪽
우리가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 가면 모든 공간이 좌우 비대칭이고 도로 모양도 제각각임을 볼 수 있다. 이런 공간 속에서는 규칙을 찾기가 어렵다. 규칙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중심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공간 내에 권력의 차등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건축 공간의 좌우대칭 배치는 공간을 하나로 묶어 커다란 존재감을 만들어서 개개인을 스케일상으로 압도하기 위한 건축적 전략이다.

211쪽
현대인들은 신전 꼭대기를 우러러보기보다는 TV나 스마트폰 스크린을 더 많이 쳐다본다. 그 모니터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 건축에서 미디어로 양상만 바뀌었을 뿐 바라보기와 권력의 본질은 그대로다.

224
과거에는 웅장하고 멋졌던 계단이 현대 건축물에서는 그저 벽에 둘러싸인 채 햇볕도 바람도 경치도 없는 비상계단의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252쪽
중세 시대는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전이었고, 책들은 모두 필사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서 일반 대중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 책을 만드는 일은 대부분 수도원에서 했고 성직자들과 일부 귀족만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 집단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극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성경책 대신에 공자와 맹자의 서책들이 그 역할을 했다. 옛 선현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양반들만이 권력에 접근 가능했던 것이다.

290쪽
요즘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 중에는 교보문고나 별마당 도서관 같은 책이 있는 공간들이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도서관이나 서점처럼 책이 있는 공간이 인기다. ...... 지금의 도서관은 사람이 모이고 정주하는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 ...... 도서관은 자고로 걸어갈 만한 곳에 있어야 한다. ...... 5천 평짜리 도서관 5개보다는 5백 평짜리 도서관 50개가 더 좋다.

314쪽
인류 문명의 큰 공헌을 한 언어와 문자는 이처럼 사람의 뇌를 병렬로 네트워크시키는 발명품이자 케이블인 것이다.

324쪽
현대사회에서 나는 내가 소유한 공간으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비한 공간으로 대변된다. ...... 내가 제작한 디지털 자료로 만든 나의 사이버공간이 나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계속해서 자신이 간 맛집과 여행지와 자신이 읽은 책을 포스팅한다....... 실로 가상공간의 정보가 실제를 압도하는 사회다. 

325쪽
생명체는 순환계가 먼저 발생하고 이후에 신경계가 진화, 발전한다. 그리고 신경계가 계속 발전하면 중추신경계가 나온다. ...... 도시에서 중추신경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불리는 IoT와 5G 기술일 것이다. 현재 컴퓨터 전문가들은 몇 년째 정기적으로 독일에 모여서 기계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언어의 표준화 작업을 하고 있다. ...... 기계끼리의 소프트웨어 언어 통합, 음성인식, 동시통역이라는 세 가지 기술이 완성되면 모든 기계와 기계, 기계와 인간, 모든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소통의 고리가 완성된다. 이것이 중추신경계의 완성이다.

329쪽
사람은 기술의 발전을 이루고, 기술 발전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 기술은 바뀌어도 인간의 유전적 본능은 그렇게 빨리 바뀌지 않는다. 당연히 그 속도의 차이에 따른 갈등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은 역시 전통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는 길밖에 없다.

334쪽
자연에는 담장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동물들은 벽을 쌓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정치적 혹은 종교적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고 벽을 세우고 공간을 나눈다. 자연에 있는 유일한 선은 물과 땅이 바뀌는 강변이나 해안선 같은 것들뿐이다. 그나마 이 선들도 밀물과 썰물, 파도, 장마 등으로 끊임없이 변하면서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368쪽
우리는 신축 아파트를 선택할 때 실제 집에 가 보는 것이 아니라 모델하우스에 가서 고른다. 모델하우스에서 우리는 각 세대의 실내 인테리어만 보고서 자기가 살 집을 결정한다. 내가 살 집의 외관이나 방에서 창문 밖의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집을 결정한다. 오로지 인테리어와 평면도만 보고 고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엌에서 동선이 좋다느니,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을 때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느니 같은 시시한 이유로 디자인을 자랑한다. 과연 이러한 사항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나 주변 환경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까? 우리나라 건축이 발전하지 못한 데는 이러한 모델하우스 분양을 통한 주택 공급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대부분 국민의 의식에 건축은 없고 인테리어가 있을 뿐이다.

373쪽
건축물을 만들 때 우리는 건축물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그 건축물이 담아내는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차를 선택할 때 자동차의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외관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동차를 누구와 함께 타고 어디를 가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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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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