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이장님의 귀농귀촌 특강 - 백승우


26쪽
이웃! 제가 생각하기에 귀농 귀촌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30쪽
다른 무엇보다도 시골로 내려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무시무시한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봉건적이기까지 해서 아주아주 불합리하기 짝이 없으니, 둘은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딪치다 보면 부대끼고, 한참을 부대끼다 보면 내가 이러려고 시골로 왔나 싶은 생각에 그만 만사 다 때려치우고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맙니다.

41쪽
남향, 길, 정방형. 이렇게 세 가지를 갖추면 좋은 땅이라고 봅니다. 땅의 방향은, 인접해 있는 산을 등지고 섰을 때 보이는 방향입니다. ...... 현장에 가보니 길이 있다고 길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지적도를 꼭 떼어 봐야 합니다.

59쪽
처음 기초할 때 확실히 지르고 뒤로 갈수록 아껴야 해요. 기초가 튼튼한 집이 좋은 집입니다.

61쪽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큰 보람 중 하나는 내가 눈 오줌과 똥을 나를 먹여 살리는 땅에 되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마당 구석에 품위 있는 멋들어진 생태 뒷간 하나 지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87쪽
농사는 그 자체로 일이고 삶입니다. 일상과 일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91쪽
네 품 하나와 내 품 하나를 맞교환하는 방식의 품앗이나, 같은 일을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해나가는 방식의 두레는 잘 들여다보면 등가교환이 아닙니다. 손이 빠른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습니다. 땅이 많은 집도 있고, 적은 집도 있습니다. 일을 잘하는 데 따르는 보상은 화폐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이웃들의 '인정'과 '존중'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때를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경합하고 협력합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경합이 아닙니다. 목표는 모두가 이기는 것이죠. 누구에게 이긴다는 말인가요? '때'.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입니다. 도무지 어찌 해볼 수 없는 완전한 종속입니다.

108쪽
사람들이 이런 수입농산물로 배를 채우니 우리 농민들이 농사지어먹을 품목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고, 수입 들어오기 힘들어서 그나마 돈이 되는 품목은 몇 개 안 되는데 사람들이 돈 되는 그 품목으로 다 몰려들어서 여지없이 농산물 값이 폭락해버리는 거라고.

109쪽
우리는 그냥 먹고 살려고 무심코 농사를 짓는데, 그런데 사실 잘 따지고 들어가보면 농사짓는 일이 농산물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좋은 일 여덟 가지를 저절로 하게 된다는 거야. 그게 뭐냐면 우리 땅을 잘 가꾸고 보존하는 일,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을 곧장 흘러가지 않게 오래 가둬서 지하로 스며들게 하는 일, 자연환경을 지키는 일, 경관이 보기 좋고 아름답게 되는 일, 문화적 소산을 지키고 이어가는 일, 지역사회를 유지하고 활성화하는 일, 식량안전을 지키는 일, 사람들이 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이는 터전을 가꾸는 일 등등이야. '농업의 다원적 기능'이라고 하는 건데, 이걸 돈으로 따지면 수십조 원이나 돼서 농산물 값을 다 합한 것보다 외려 이 돈이 더 크다는 얘기야.

122쪽
발품을 많이 파는 건 좋은 일입니다. 당장은 돈과 시간이 많이 깨지기 떄문에 아까운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좋은 추억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준비하는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길게 잡는 게 좋습니다. 이때가 제일 좋을 때예요. 귀농하겠다고 얘기 나누러 찾아오시는 분들 보면 눈이 반짝반짝합니다. 새로운 희망과 설렘이 있어서 그렇지요. 얼마나 좋아요. 성급하게 결정을 내려서 즐거운 시간을 단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근데 정작 당사자는 그걸 잘 모른단 말씀이지요.

181쪽
농번기에 말이지요, 새벽에 일어나면 어제 쌓인 피곤이 채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손발이 뻣뻣해서 일하려면 한잔 걸쳐야 합니다. 일하다 보면 배가 출출해지는데, 밥상 차려 먹기에 시간이 빠듯합니다. 날이 쨍쨍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일해야 합니다. 그러니 농주 한잔 걸치고 또 일하는 겁니다. 낮에 해가 쨍쨍해지면 밥보다 잠이 급합니다. 한숨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서 또 일합니다. 한잔해야 몸이 말을 듣습니다. 오후쯤이면 벌써 거나하게 취해 있습니다. 밤늦게 상차가 끝나면 한잔하고 하루를 마칩니다. 만취상태로 잠듭니다. 다음날 일어나면 또 몸이 말을 안 듣지요. 한잔해야 합니다. ...... 꼭 다 이렇지는 않지만, 농번기(보통 4월에서 11월까지)에는 핑핑 돌아가야 합니다. 요즘은 하우스 농사가 번성해서 철이 없이 핑핑 돌아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

183쪽
귀농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마도 이 두 가지를 크게 넘어서지 않을 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문화적인 어려움. ......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지금 당장 여기서 온전한 삶입니다. 내가 맺고 싶은 관계는 지금 당장 여기서 온전한 관계입니다. 옳지 않다면 내가 바뀔 수 있고, 옳지 않다면 네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을 서로 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채우는 충만한 삶.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
톱니바퀴, 맨 끝에 맞물린 가장 작은 톱니바퀴에 대롱대롱 매달려 핑핑 돌아가는 농업 노동자로 사느냐, 아니면 이것 탁 뿌리치고, 이 사슬을 딱 끊어버리고 즐겁고 행복한 농부로 사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거지요. 이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만큼 소비하면서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
이렇듯이 '생산'의 방향, '경제'의 방향에서 문제를 풀려는 시도들, 예컨대 농민회나 생활협동조합이나 기타 등등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톱니바퀴에 말려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자연의 시간에 따르는 길이 아니고, 사람의 시간을 따라가는 길은 농업, 농사에 맞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거나 땅이 죽어납니다. 행복할 수 없어요.
저는 '문화'의 방향, '소비'의 방향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 바로 이 대목에서 '운동으로서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지요. ......
농사를 줄인 만큼 소비를 줄이자.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면서 자급자족하며 살고자 했던 그때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185쪽
이 와중에 비가 오기도 하고, 주문이 없어서 훌쩍 커버린 부채만 한 깻잎을 하릴없이 따서 버려야 하고, 이제 좀 딸 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깻잎에 병이 오고, 깻잎이 너무 크다, 너무 작다, 질기다, 이 소리 저 소리 들어야 하고, 주문이 많은 날은 꼭 깻잎이 모자라고, 목 빼고 주문 기다릴 때는 주문이 없고, 무수하게 달려드는 모기에 헌혈해야 하고, 하여튼 좀 지랄 같은 일입니다.

193쪽
유전자의 농간이겠죠. 밥을 먹거나 똥을 눌 때 쾌감이 따르는 것처럼 농사에도 쾌감이 스며 있습니다.

194쪽
남 먹이는 농사는 나 먹는 농사처럼 짓기 어렵습니다. 먹는 사람들, 소비자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 가격은 농민이 아니라 도매상인이 정합니다. 도매상인은 높은 값을 받고 쉽게 팔 수 있는 농산물에 후한 값을 줄 테고, 그렇지 않으면 낮은 값을 주겠지요. 도매상인은 소매상인의 눈치를 살피고, 소매상인은 소비자를 의식합니다. 농산물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최종 지배자는 결국 소비자입니다.

200쪽
웃자고 하는 소리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소비문화가 완전히 바뀐 사회에서는 소비자들이 농민들의 "속박이"를 열렬히 원하고 환영합니다. 크고 작고 반듯하고 구부러진 것들이 골고루 섞여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포장한 농산물을 내놓으라고 소비자들이 상인들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그 압력은 너무나 격렬한 것이어서 유통하는 분들이 감히 크고 반듯하고 둥글둥글하고 속이 꽉 찬 것들만 따로 모아 진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이웃 중에 크고 반듯하고 둥글둥글하고 속이 꽉 찬 농산물만 따로 골라서 가져가려는 사람이 발견될 경우, 식당에서 담배 피워 무는 사람을 모두가 째려보듯이 완전히 몰지각한 미개인 보는 눈으로 째려봐 주는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이런 사회에서라야 비로소 자연이 키우고 사람은 옆에서 거들 뿐인 자연스러운 농사, 진짜 친환경농사가 자연스럽게 번져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204쪽
스무 명이 가는 대산농촌문화재단 해외농업연수단의 일원이 되어 쿠바에 가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저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못 가게 되지 않았나 싶어서 조금 마음이 쓰이기도 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라고 담당 과장님이 얘기해주셔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233쪽
국제연합(UN)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보건기구(WHO)가 식품의 국제기준을 정하기 위해 만든 코덱스위원회(CAC)는 유기농업을 "생물다양성, 토양의 생물학적 활성화 그리고 자원의 생물학적 순환을 더욱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생산하는 농업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234쪽
어쨌든 우리 유기농업의 역사는 이런 맥락 위에 서 있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농산물의 안전성", "소비자의 건강", "농사꾼의 살림살이" 같은 것들입니다. ......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 쿠바 사람들은 유기농업을 하는 첫 번째 목표가 건강이 아니고 환경 생태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이 건강이고, 세 번째는 저투입 저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올바르게 하지 못한 데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238쪽
​농산물이 왜 공공재냐라고 누가 물었을 때 가장 강력한 논거가 되는 것은 농업의 다원적 기능 여덟 가지(국토 보전, 수자원 함양, 자연 환경의 보전, 경관의 형성, 보건 휴양, 문화적 소산의 전승, 지역사회의 유지 및 활성화, 식량안전보장 등)이고, 이런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대표적인 작물은 쌀입니다. 농사가 농사꾼 개인의 사적인 경제 행위가 아니고 국방이나 치안 기초행정업무 등과 같은 공공서비스로 정의되고, 농산물이 공공의 재화로 자리 잡고, 농사꾼이 공무수행요원으로 정착되는 첫걸음은 그래서 당연히 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쌀로부터 시작해서 잡곡으로 점차 확대하고 기초농산물 전반으로 확대하고 최종적으로 전체 농산물에 대해 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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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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