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도 괴롭진 않아 - 원유헌 / 원유헌의 구례일기


18쪽
이것저것 생각하니 머리만 쑤신다. 두어 해 전 귀농해서 지자체 지원을 받아 대규모 시설 원예를 시작했던 후배가 실패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올라갔다. 저리 융자를 지원받았지만 그렇다고 이자 안 물고 원금 안 갚아도 되는 게 아니니 모조리 빚이다. 달콤하게 받았지만 뼈저리게 갚아야 한다. 정부 농업 정책도 대농 중심이니 나 같은 소농에겐 햇살이 돌아오지 않는다. 농축산 시장은 열어젖히지 못해 안달이다.​

 

115쪽
"글고 행님, 관행농 관행농 헌디, 원래 관행농이 유기농이라, 조상들이 언제부터 약 쳤다고 약 치먼 관행농이고 약 안 치먼 유기농이다요? 거 조상들 욕되게 허는 것 같아 그 관행농이란 말 맘에 안 듭디다." ...... "사 묵는 도시 사람들도 무식허기는 마찬가집디다. 어치케 약 안 치고 유기농으로 지은 것들이 그렇게 한같이 깨꼬롬하고 이삐다요. 그런 것만 찾은께 억지로 갖다 붙이는 거 아닌가요."

 

286쪽
라운드업Roundup과 라운드업레디Roundup ready. 희극이거나 비극적인 이야기다.

 

190쪽
"아, 아, 회관입니다." 하는 말이 들리면 화장실에서 물 내리려다가도 멈춰야 한다. ...... 마을 회관 방송은 농촌 행정의 마지막 완성 단계이자, 농사 정보의 중요한 창구요, 만사를 결정하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농사 관련 모든 업무의 신청-접수-수령을 집행하고, 마을의 경조사와 행사 정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190쪽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 끝나는 방송은 사실 부탁이나 청유가 아니라 명령에 가깝다. "방송 못 들었대?" 이 말은 "이 마을 사람 맞어?" 혹은 "정신이 있는 거여?"와 같은 뜻이다.

208쪽
정착할 곳을 구례로 정한 다음에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좌청룡, 우백호에 배산임수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향에 가깝고 해 잘 드는 곳이면 좋겠다 싶었다. 물론 집 안에서 바라다보는 경치까지 좋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말이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열심히 찾았고, 끝내 그런 곳은 없다는 걸 알았다. 남향의 양지바른 터는 이미 마을이 들어서 있거나 임자가 있었고, 경치가 좋은 곳은 험하거나 펜션이 들어 앉아 있었다. 이것저것 다 좋아 보이는데 임자가 없거나 땅값이 싼 곳은 물이 솟는다거나 지반이 약하다거나 하는 이유가 있었다.

239쪽
대부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매물이 있으면 위성 사진으로 슬쩍 내려다보고, 한적한 곳인 데다 근처에 계곡이라도 있으면 낙점을 한다. 그리고 일단 현장에 가보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대강 똑같아 보이는 땅도 하루 만에 눈이 다 녹는 곳과 겨우내 얼어 있는 곳이 따로 있고, 같은 필지 내에도 뽀송뽀송한 데가 있고 물구덩이처럼 내내 젖어 있는 곳이 있다. 하루 발품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
혹시 누가 들으면 도시 출신이라 도시 사람 걱정하는 줄 오해할까 봐 얘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무모하고 무식한 행동 때문에 원래 살던 사람들, 농사짓는 사람들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귀농 희망자들이 생각 없이 구입한 가격은 그 주변 농지와 택지의 기준 가격이 돼 버린다.


33쪽
공자님 말씀이 생각났다.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태풍이 그치질 않고, 잡초는 뽑아 주려 하나 손길 기다리지 않고 무성해지는 구나. 망할 것들.
사실은 이 망할 것들이 바로 '자연'이건만, 자연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자고 하면서 자연을 원망한다. 가끔 TV를 보면 귀농에 성공했다는 사람이 멀쩡한 밀짚모자 아래 하얀 얼굴로 "자연에 파묻혀 살고 싶어서 농사를 결심했습니다." 이런다. 농사가 자연이라고? 뿌리랑 이파리만 있으면 그게 자연인가? 비닐하우스도 자연인가? 사람들에게 이로운 초목만 자연인가? 자기중심적이고 조금 오만하다는 느낌도 든다.
농사는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하나하나 사람 손이 가야 하고, 어울려 자라는 것들을 가르고 구분해 놓는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곡식이나 채소라고 부르고, 도움이 안 되는 건 죄다 앞에 '잡'자를 붙인다. 잡초, 잡목, 잡새, 잡놈...... 그중에서도 더 맘에 안 들면 해충이니 유해 조수니 하고 분류를 한다.

68쪽
70년 경력의 베테랑이 초짜 신병인 나한테 방법을 물으시니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할머니, 왜 저한테 가르쳐 주시지 않고 물어보세요?" 여쭤보니 "원샌이 생각헌 것이 있을 것인디, 어치케 내 맘대로 심는다요." 하셨다. '지극한 예는 물어서 하는 것'이라고 했던 공자의 말씀이 실현되고 있었다.

75쪽
"아빠 꿈?" ...... "간전댁 할머니 나이 때 할머니처럼 되는 거. 모두에게는 아니라도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고 가르침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89쪽
이렇게 고마운 회원들 덕분에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많다. 시장에 내맡기는 농산물 가격이 아니라 작물마다 가진 고유의 가치를 따져 보고 싶다. 회원의 요구에 맞춰 생산량을 계획하고, 그이들이 원하는 품목을 재배해서 공급하면 좋겠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땅도 그이들과 나눠 가지면 좋겠다. 그리고 음식물 제조업 종사자가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을 고민하는 철학자가 되면 좋겠다. 이 모든 게 꿈이겠지만 깰 때 깨더라도 지금은 꿈꾸고 싶다.

246쪽
마늘이나 감자나 둘 다 뿌리 작물인지라 위에 맺는 꽃이 수확에 방해가 된다고 잘라 준다. 후대를 위해 애쓰는 생명의 생식기를 자르는 것이니 동물로 말하면 거세하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안하다. 서양에서는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는데 식물 복지라는 말은 말이 안 될까. 같은 생명이고, 태어나서 가급적 본연의 생태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게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하긴 웃음을 지을 정도로 행복하게 잘 키운 동물을 결국 좋은 먹거리라고 쓱싹 잡아먹는 거 보면, 동식물에 복지 어쩌고 하는 게 너무 인간 중심적인 생각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람 복지도 제대로 건사 못해서 맨날 쌈박질하는 중계 방송을 보고 사는데 뭐.

255쪽
팔순을 앞두고 있던 한옥 사진작가께서 하신 말씀이다. "모든 사진은 눈높이에서 사람의 시각과 비슷한 표준 렌즈로 찍는 게 중요해요. 뒷산에 올라가 한옥을 찍거나 바닥에서 크게 왜곡해서 찍어 놓고 멋있다고 얘기하면 곤란해요. 뒷산에 올라가서 지붕 내려다보고 살 건가? 아니면 붕어 눈깔 끼고 누워서 살 건가? 세상살이도 마찬가집니다."


89쪽
"농사일 좋은 것이 뭐인가. 오늘 못 허면 내일 허고 내일 못 허먼 모레 허고 그먼 되제."

193쪽
쌀쌀한 날씨에 야전에서 먹는 돼지 김치찌개와 소주, 막걸리는 목으로 넘어가면서 보약이 되는 느낌이다. 오전부터 비틀거리는 형님도 있고, 아직 붉게 타는 태양 아래 묘지에 누워 주무시는 형님도 있다. 희한하다. 도시에서 가끔 보는 불편한 모습이 촌에서는 편안하게만 보이니 말이다.
​​
213쪽
다른 계절 이름과 다르게 봄만 한 글자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다 그렇단다. 맞는 것 같다. 눈, 코, 입, 귀, 밥, 술,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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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산 - 프리랜서 디자이너. 지리산닷컴 운영

282쪽
권: 원 기자 개인적인 농사 원칙이 있습니까?
원: 세 가집니다. 무화학농, 비닐멀칭 반대,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권: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원: 감당의 의미도 있고 땅의 소유권에 대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권: 근께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땅을 거시기 해불면 곤란하다 뭐 그런?
......
권: 그렇게 감당할 수 있는 농지 면적이 몇 평인 거 같습니까?
원: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3, 4백 평 정도죠.

286쪽
그가 앞서 한 말, "인간이 잘해서 잘된 일은 별로 없습니다."의 연장선을 보았다. ...... 간혹 확인하는 일이지만, 미래가 암울하다는 전망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미래를 지연시키려는 노력, 즉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서 저항한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끊임없이 수행한다. 

287쪽
권: 꿈이 있습니까?
원: 꿈이라...... 농부로서 제 꿈은 토지개혁입니다.
권: 헐! 그 토지개혁의 내용이 뭡니까?
원: 경자유전입니다.


​[네이버 책]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 -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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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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