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만감일기 - 박노자

5쪽
인터넷 일기는 자기만의 글인 일기와 공적인 글인 신문기사 사이에 위치하게 되기 때문에 늘 타자의 시선을 의식해서 쓰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타자의 시선이야말로 인터넷 일기쓰기의 장점이다. ...... '내면' 전체를 '남'에게 다 '개방'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일부를 '열어놓아' 토론 대상이 될 만한 민감한 문제들을 놓고 과감히 '소통'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 일기쓰기의 묘미다.

17쪽
식당에선, 급료를 몇 푼 받지 못하는 종업원에게 음식 값의 15%나 되는 돈을 팁으로 줘야 하는, 다시 말해 손님이 고용주 대신 급료를 지불해야 하는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26쪽
노르웨이에는 자신의 스승(사실 그런 개념도 아니긴 하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 법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학생 뒤에 그의 미래를 책임질 사회와 국가가 버티고 있지만 한국에는 그런 버팀목이 없다. 때문에 '어려운 관계' 속에서 거절하려 하면 '내 미래가 불안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 '모나지 않게 둥글게 사이좋게 원말하게'만 살아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하는 걸까?

37쪽
"그냥 꿇기만 하면 그런 일 당할 이유가 없는데 뭐하러 빳빳이 굴어, 사서 고생이지." 그렇다. 이는 자본에 포섭되어 자본의 질서를 당연지사로 보는 시각을 이미 내면화한 '순치(길들이기)된 대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49쪽
불교 경전은 폭력을 근절하는 내면의 길, 즉 팔정도(부처님이 제시한 여덟 가지 바른 길, 바르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목숨 부지하고 노력하고 기억하고 마음 안정을 찾는 일)를 가르친다. 그러나 내면이 아닌 외면의 차원에서 불교는 역사상 한 번이라도 계급 평등을 외치거나 승려가 아닌 속인의 병역거부를 제창한 적이 있던가? 

52쪽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대중의 사고 역시 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건 마음 아픈 진리다.

53쪽
경제투쟁이야 빈번히 일어나고 또 대중에게 좋은 학습 기회가 되지만 이건 '반자본투쟁'이라기보다는 자본과 공존하기 위한 조건을 조금 개선하려는 투쟁에 불과하다. ...... '세계혁명'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대신 '세계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69쪽
경제력을 독점한 남성이 경제력이 결여된 여성에게 경제력을 무기로 폭력을 휘두르는 게 성매매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 구매는 '경제력에 의한 강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81쪽
성에 대한 억압은 곧 권위주의, 극단,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라이히Wilhelm Reich가 이야기한 지 벌써 70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그걸 알고도 그 악순환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89쪽
지배, 복종의 사회에는 규율이 있을지언정 '권위'는 없다. '권위 인정'이라는 건 자율적인 한 개체가 또 다른 자율적인 개체에 대해 내리는 주체적 판단인데 ......

94쪽
가정에서도 그렇지만 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은희 님'이라고 부르고 교수가 학생을 '한별 님'이라고 부르는 등 동등한 호칭을 구사하고 수업시간에 서로 '요'자를 붙여 대화한다면 교사가 학생에게 손들기가 조금 어려워지지 않을까.

105쪽
민노당의 진정한 지지자에게, 당 지도부란 '밑에서' 늘 견제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부르주아 정치인으로 타락할 수도 있는, 잘못하면 언제든 부르주아 정치에 포섭될 수 있는 '가변적 인간'들이지, 무슨 '우상'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 레닌이 자신의 리더십에 대해 '독재자적'이라고 맹비난한 트로츠키를 1917년 여름부터 가장 가까운 동지로 삼게 된 것은, 바로 비판이 일상화돼 있는 정상적인 사회주의적 문화 때문일 것이다.

118쪽
자본주의 세계체게에서 '좋은 지배가'란 원래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인권'을 운운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1년에 5,000만 달러 가까이 쏟아 붓는 노르웨이 지배자들이 '한국 지배자보다 낫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노동자 투쟁을 무마하고 '법'의 테두리 안으로 제도화시킨 경험이 있으므로 준법의식의 차원에서는 나은지 몰라도 그 '인본주의적' 위선은 사실 매우 역겹다.

126쪽
학교에서 일제시대의 훈육주의가 그대로 판을 치는데, 이광수와 최남선과 박정희가 친일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봐야 뭘 하겠나? '명단 발표' 정도면 이게 무슨 청산인가? 제도를 바꾸는 게 '청산'인데, 강(강만길) 선생께서 이걸 못할 줄 알면서도 일을 맡은 셈이다.

131쪽
'위안'이야 교회에서도 사찰에서도 휴게텔에서도 다 가능하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 안의 거짓을 불태우고 자기 바깥의 거짓을 적어도 '거짓'이라고 정확하게 부르는, 아주 특별한 마음상태이다.

138쪽
즉, 민노당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정책 대안을 내놓아도 이 대안에 대한 한국 민중의 판단은 '체험'이 아니라 '학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 유럽의 노동당들이 최초로 집권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세계 공황 이후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자본주의의 '위기'가 '체험적으로' 확인된 뒤에야 아직 사민주의적 정치를 '체험' 해보지 않은 유권자들이 이를 '불가피한 대안'으로 보고 선택한 것이다.

140쪽
노르웨이 노동자는 자신의 직업적 인생을 노동자로 마감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돈을 좀 모아 가게라도 열자"는 심리가 아직 강하다.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도 좋을 만큼 노르웨이에서는 피고용자의 노후 보장이 잘 되어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144쪽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이 체제로서는 소화할 수 없는 분자다. 그렇기에 이 위험을 지금 '전교조 죽이기'를 통해 원천 봉쇄하려 하는 모양이다.

152쪽
사실, 나는 '국민 1인당 소득 2만 달러' 보다 '산모 1인당 보조금 500만 원 시대'라는 구호가 훨씬 더 구미가 당긴다.

156쪽
나처럼 '딴소리'가 전공인 자들은 분명 당의 주변에 필요하겠지만, '집단에 대한 귀속 의식'이 초석이 되는 당 정치는 이러한 머리로는 할 수 없다.

163쪽
그런데 우리 역사 서술은 1920년대의 그 '의거'에 왜 이렇게 무게를 많이 싣는지 모르겠다. ...... 대중성이 확보된 공산주의적 투쟁, 즉 노조와 당 건설, 파업 주도 등은 이에 비해서 훨씬 덜 폭력적이면서 더 효율적이었다.

167쪽
물론 한국에서도 가족이고 동창이고 '연고' 있는 사람들이 다 챙겨주겠지만 내성적 성격 때문에 '연고'를 안고 살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차라리 공동체가 챙겨주는 형태의 생활이 더 편하다.

178쪽
나는 김일성과 그 일파에 대해 솔직히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는데 김일성과 주체주의를 싫어하면 할수록 이와 같은 '사법적 폭력'에 대한 분노가 더 치밀어 오른다. ...... 북한 정권을 바로 보려는, 즉 그 정권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판결의 철회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해야 할 것이다.

201쪽
"동포들을 무조건 사랑하자"는 논리를 설파할 일이야 적어도 나(국제주의적 사회주의자)에게는 없지만, 같은 언어적 사회적 공간에서 같이 사는 이들에 대한 일차적 관심과 책임, 그들의 멸고득락을 도우려는 마음이 좀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본다. ...... 현실적으로 '한국인으로서의 나'는 대개 같은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더 많이 줄 수 있다는 부분도 부정할 수는 없다.

214쪽
현실적인 국가에는 세금을 한 푼이라도 안 내려고 난리지만, 당위론적 '국가'에 대한 귀속 의식은 매우 강한 곳이 이곳 한국이다.

244쪽
사실, 그게 근대적인 지배의 조건이 아닌가 싶다. 민족주의든 국민개병주의든 '신성 국방'이든 '주체사상'이든 저들이 만든 거칠고 맛없는 사상적인 음식들은 대중식당으로 공급되는 것이지, 저들이 점심 때 가는 특급식당으로 공급되지도 않고 또 그럴 리도 없다. ...... 근대적 지배의 조건이 철저한 냉소 정신인데, 상당수의 백성이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 마음 아프기만 하다.

250쪽
사실 남한의 현대사는 저곡가 정책에 숨이 막혀 기를 펼 수 없던 민중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끊임없이 모여들며 만들었던 '국내 노동 이민'의 역사라 봐도 무방하다.

269쪽
현재 한국사회가 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여러 모로 이 '우승열패'의 논리가 관철되는 프로 스포츠와 아주 닮았다. ...... 1920~30년대만 해도 세계 좌파 운동진영에서는 경쟁이 없는, 무엇보다 노동자의 '움직임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안 스포츠'를 여러 가지로 실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실험들은 제2차  세계대전, 냉전 등의 와중에서 그냥 망각되고 말았다. 정녕 우리는 '경쟁'하지 않고 스포츠를 즐길 수 없을까?

275쪽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국가 폭력의 '합법성'의 기준이란 결국 해당 국가가 개별적으로 정하여 그 주민들에게 그 정당성을 주입시킨 것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279쪽
부석사나 불국사, 황룡사, 석굴암 등은 신라라고 하는 국가의 직접적 지원으로 건설된 곳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석하면서 수행했던 스님들은 왕실의 보호와 지원에 의존했었다. 우리가 다보탑과 석굴암 본존불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는 하더라도 동시에 불교의 '국가화'가 가져다준 문제들에 대해서 깊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281쪽
일단 여성은 고질적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는 입장에 묶여 있기에 어떤 커다란 피해를 당하게 되면 꼭 한쪽으로부터만 당하지 않는다.

301쪽
사민주의는 미래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인지도 모르지만, 이 다리를 건널 때는 발이 빠지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노르웨이 노동계급이 대단히 강하지만,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너무나 철저하게 체제에 포섭돼 있다.


124쪽
글이란 참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 때문에 글읽기로 산다는 것은, 어떤 체제에도 완벽하게 순응할 수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글줄 좀 읽는 선비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은 이 시장바닥에서 한 개인이 지니는 '몸값'을 확 높이는 노릇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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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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