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쪽
입시가 있는 시스템.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고,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入) 시험(試)을 쳐야 한다. 시험 한쪽은 지망생들의 세계, 다른 한쪽은 합격자의 세계인 것이다. 문학공모전이 바로 그 시험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의 공채 제도, 각종 고시나 전문직 자격증 시험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다.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획일적이고, 지독히 한국적이다. 지원자는 모두 한 시험장에 들어가 동일한 문제로 시험을 친다.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가 생긴다. 불합격자들이 좌절로 괴로워하는 동안 합격자들은 불합격자들과 멀어진다. 그들은 합격자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규칙을 배운다. 패거리주의, 엘리트주의가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몇몇은 이 시스템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그럭저럭 기능한다고 여긴다. 어쨌거나 그 시스템은 한국 사회에 너무나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테두리 밖에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팍팍하다.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패배자로 살아가는 게 나을 정도다. 수능을 거부하는 학생운동가보다는 대학에 떨어져 고졸 학력인 사람이 눈총을 덜 산다.
49쪽
"학교에서 '꼭 읽어야 할 책' 같은 독서 목록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런 식으로 책을 고르는 것 같아요."
160쪽
세상에는 맹비난과 논란 속에 공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신인들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거부당한다. 구체제 엘리트의 평가와 시험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선발되지 못한 이들이 퇴출당하지 않고 세상 한쪽에 작은 자리를 잡아 격렬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며 싸울 때, 거기에 소수의 열성 지지자들이 가세할 때, 그걸 운동이라고 부른다. ......
그러다 가끔, 드물게 어느 순간, 정말 순식간에 시대가 휙 바뀌어 버린다. 옛 주장을 하던 사람들은 바보처럼 보이고, 새 주장은 그걸 왜 여태까지 몰랐는지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당연해 보인다. 혁명이다. 그렇게 그 분야가 시대를 따라잡는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그런 운동이 언제나 사회 한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세상에는 또라이처럼 보이는 괴짜 천재들도 있다. ......
사회 부적응자들과 괴짜 천재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은, 시도 단계에서는 '어처구니없다, 황당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상상을 뛰어넘으니까. 아무도 그걸 이해 못하니까. 특히나 두툼한 인사 평가 매뉴얼을 가진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관료 조직이 그런 혁신과 혁명가를 알아볼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원하는가? 그러면 또라이, 반항아, 괴짜들이 설칠 땅을 마련해 줘야 한다. 한국 기업이 모두 공채를 없애고 또라이들을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 공채와 별개로 또라이들이 사회 한구석에서 무모한 모험과 실험을 더 많이 벌여야 한다. 대담한 아이디어들은 실제로 구현해 보기 전에는 괜찮은 것과 황당한 것을 구분할 길이 없다. 모험가들이 황당한 아이디어를 성공시키면 그다음에 더 큰 회사가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인수하거나 창안자를 영입해야 한다. 또는 모험가들이 직접 자기 회사를 키우거나, 그런 과정이 더 쉬어지고 더 많아져야 한다. 어떤 아이디어들은 그런 식으로만 건질 수 있다.
263쪽
이 책의 주제와 별도로, 나 또한 이런 현실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송계, 음악계, 패션계, 게임 업계, 연극, 웹툰, 요리, 모두 마찬가지다. 노동 착취를 꿈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것만큼 역겨운 일도 없다. 동시에 나는 이들 업계에서 '지망생'들이 자기 착취에 빠지게 되는 상황이 현재 각 분야의 채용 또는 신인 선발 시스템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265쪽
나는 글의 스타일은 작가의 성격이라고 믿는다. 성격이 차가운 사람은 건조한 문장을 쓰게 된다. 세계관이 명료하면 단호한 소설을 쓰게 된다. 극단적인 성향의 작가는 논쟁적인 작품을 내놓는다. 나는 내 성격을 바꾸는 대신 그냥 내 스타일로 쓰기로 했다. 그렇게 쓴 소설이 <표백>이다.
360쪽
정부는 국민연금공단과 국세청의 자료 외에도 더 방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어느 회사가 근로기준법을 어긴 적이 있는지, 임금 체불 진정이나 신고가 접수된 적이 있는지, 그곳에서 어떤 산업재해가 어떻게 일어나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어떤 노동 쟁의가 무슨 이유로 발생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직장 내 성범죄로 처벌받은 직원이 있는지...... 전부 정부 전산망에 기록돼 있다. 구직자 입장에서는 천금과 같은 정보들이다. 깜깜한 구직 시장에 빛을 던져 줄 등대들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데이터를 잘 공개하지 않는다. ......
나는 이런 정보들에 대해 구직자들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시장경제 국가의 정부는 이런 정보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
한국 사회는 공공기관의 조사가 끝나 법원에서 판결까지 내린 사안에 대해서조차 구직자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수한 중소기업이 많은데 요즘 젊은이들은 대기업만 바라본다'고 그들을 꾸짖는다. 가증스러운 기만이다. 지뢰밭으로 들어가기 주저하는 군인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다그치는 꼴이다.
425쪽
그렇게 관료 집단이 된다. 이 집단의 질서는 실력이 아니라 기수 문화와 인맥, 파벌이다. ...... 그런데도 뼛속 깊이 오만하다.
426쪽
한국 사회는 그런 식으로 유능한 인재를 많이 놓쳤을 것이고, 앞으로는 더 많이 놓칠 것이다. ...... 공모전과 공채가 아닌 다른 길로 성공하기는 거의 힘드니, 당연하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공모전과 공채에 온 힘을 쏟게 된다. ......
이런 환경에서는 사교육 시장이 성한다. ...... 젊은이들이 그런 공부에 매달릴수록 사회 전체의 에너지가 낭비된다. ......
합격자와 당선자는 늘 소수일 수밖에 없다. ...... 그렇게 패배감, 좌절감, 열등감이 퍼진다. ...... 엘리트 계층의 나태함이나 무능함, 비도덕성이 드러날 때면 반대쪽에서 공분이 폭발한다. ......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모색도 종종 주류와 비주류의 대결이라는 틀에 갇히곤 한다. 비유하자면 '양반이 상민이 되고, 상민이 양반 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정도에 그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꿈꿔야 할 사회는 그런 구분 자체가 없는 곳이다. 그곳에는 양반도 상민도 없어야 한다.
429쪽
모험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그려 제공하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 ......
나는 사람들이 모험을 하게 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믿을 수 있는 정보는 그중 하나다. 다른 두 가지는 충분한 보상과 실패했을 경우의 대비책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그 세 가지가 다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과 기업들은 모험을 극히 꺼린다. 그 결과 역동성이 점점 사라지고 우리 공동체가 계급사회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는 중이다. 상속, 혼인, 시험과 같은 이벤트가 아니면 신분을 바꾸기 어려운. ......
어떤 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정보를 쌓고 의미 있게 엮고 공유하고 활용하는 일이 하나의 공동체 운동이 될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한다.
435쪽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모두 공모전을 준비해야 한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됐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고 싶은 어떤 사람이 공모전을 준비하는 것은 아무 잘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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