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쪽
<내가 시작한 미래>라는 제목에서 보듯, 인터뷰에 참여한 인물들은 완결된 유토피아를 전제하기보다 과정으로서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전환마을 은평 - 소란
29쪽
퍼머컬처는 '영속적인 문화(permanent culture)' 혹은 '영속적인 농업(permanent agriculture)'의 축약어로, 1970년대 호주의 빌 몰리슨Bill Mollison과 데이비드 홈그랜David Holmgren이 공동 창안한 개념이에요. 퍼머컬처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패턴과 관계를 모방해 의식주와 에너지를 지속가능하게 충족시킬 수 있도록 개인-가족-지역공동체를 디자인하는 방법이에요. 거창하거나 대단한 이론이 아니고요, 쉽게 말해 자연에서 지혜를 얻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는 기술이자 철학이에요.
48쪽
인터뷰어: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 지원금을 마을회의를 통해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을은 살림을 사는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지 경제성장을 이뤄야 하는 곳이 아니에요. 전환마을에서는 마을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자원을 찾아내고 마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생명력을 키우는 게 중요해요. 그러니 마을에 자력이 생기기까지 훈련과 연습을 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진 후 필요에 따라 공동체가 동의할 경우 투자를 받는 게 원칙이에요.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덜컥 지원금을 받게 되면 지원금을 위한 사업밖에 안 되니까요. 활동가들이 혹사당할 수밖에 없고요. 돈이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하고 싶고 우리한테 필요한 사업을 천천히 해나가는 편이 훨씬 좋아요.
또 저희는 하고픈 일에 걸림돌이 되는 규칙은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 밥풀꽃만 하더라도 협동조합 방식이긴 하지만 협동조합으로 등록하지 않았어요. 협동조합은 총회도 해야 하고 운영위원회도 만들어야 하고 서류도 필요해요. 그렇게 서로를 지치게 하는 형식을 접어두고 정할 게 있으면 밥 먹으면서 회의하기로 했죠.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 이경란
69쪽
저희는 '자공공(自共公, 스스로 돕고 서로 도우면서 새로운 공공성을 만들어가자,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이 창안한 개념)'이라고 표현해요. 일반적으로 공공성이라고 하면 국가의 역할만 이야기하는데, 지역사회와 작은 공동체들, 그 안의 개인들도 역할이 있어요.
72쪽
뺀질대던 사람이 어느 순간 훅 들어와서 일을 열심히 하는 걸 볼 때가 많아요. 사람마다 '때'가 다른데, 기다려주면 언젠가 마음이 열려요. 그런 경험이 약해 갈등만 겪고 있는 조직은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나누는 걸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힘들어져요.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 나준식 김성훈
88쪽
우리는 아플 때만 병원에 가지만 건강이란 모두 아는 상식처럼 건강할 때부터 지켜나가야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의료제도 아래에서는 병원은 치료만 하게 되어 있어요. '행위별 수가제'라는 게 처치나 처방에 따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돈을 주는 구조라 예방이나 건강증진 활동에는 소극적이에요. ......
의료사협, 즉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주민들이 스스로와 지역사회의 건강에 주인이 되는 조직이에요. ......
2012년에 의료생협에서 의료사협으로 전환한 건, ...... 거기다가 당시 유사 의료생협이 급증하고 있어 ...... 소비자생협법의 허점을 이용해 수백 개가 넘는 무늬만 의료생협인 곳들이 생겼거든요. 이곳들이 합법적 '사무장 병원'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법의 온상이 돼 진료비 과다 청구, 의료 사고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구분이 힘들어요.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의료생협들은 의료사협으로 전환한 상태예요.
93쪽
항생제 남용은 빨리 낫는 것만 중요시하고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치료의 문제라고 보는 의료소비자와, 거기에 타협하지 않고는 의사로서 살아남기 힘든 우리 사회의 의료문화, 그런 문화를 가능하게 한 의료제도와 관련이 있어요. 이건 의사나 환자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예요.
93쪽
제도가 왜 중요한지 예를 들어 보면, 영국은 의사와 일정한 수의 주민들이 주치의 계약을 맺어요. 그에 따라 예산이 지급되니까, 환자가 질병을 덜 앓고 병원 이용을 덜하면 덜할수록 치료에 예산이 적게 들죠. 남는 예산이 의사의 임금이라면, 의사는 어떻게든지 질병을 예방해 주민들이 병원 이용을 적게 하는 방향으로 일하게 될 거예요.
95쪽
여기에는 생활습관을 만드는 것부터 보건의료 정책에 개입해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꿔나가는 것까지도 포함되는데, 이런 실천을 건강 자치력이라고 보는 겁니다. 지역주민이 자기 건강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라 지역의 건강 자치력을 높여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민들레의 미션인 거죠.
108쪽
한밭레츠의 지역화폐인 '두루'가 돌고도는 과정을 김성훈에게 들어보았다. ......
여기선 하찮은 일이란 없어요. 잔심부름이나 카풀로도 두루를 벌 수 있고요. 글씨를 잘 쓰는 회원은 글씨로, 사진을 잘 찍는 회원은 사진으로 두루를 벌 수 있어요. 직접 농사지은 농산물을 팔아도 되고, 요리나 뜨개질 같은 걸 회원들에게 가르치는 품앗이학교를 열어 두루를 벌 수도 있죠. 말하자면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는 셈이에요. 또 두루를 거래하며 다양한 이웃들과 사귀게 되니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져요.
마을에너지연구소 - 안병일
118쪽
적정기술의 가장 큰 매력이요? 바로 바이오디젤처럼 조금만 배우면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죠. 자신의 필요를 돈 주고 구매해야 하는 소비자에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생산자로 변화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매력이에요.
118쪽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참 대단하잖아요. 그렇지만 따져보면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를 위해 쓰이기보다는 거대 자본의 이윤창출에만 철저히 이용되거든요. 돈이 안 되면 필요 없는 과학기술이 되는 거죠.
동물의집 - 정경섭
169쪽
세상에 기댈 곳도, '빽'도, 자본도 없는 사람들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만나는 거예요. 만나지 않고 개별로 떨어져 있을 땐 힘이 없어요. ...... 그러니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을 만나도록 하고, 그 만남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협동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 저는 특히 동네에서 만남의 공간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많이 고민했고요.
186쪽
저희는 '능동적 소비', '생성의 경제'라는 철학으로 사업을 하고 있어요. 능동적 소비는 소비자가 물건에 대한 이윤을 인지하고, 그 이윤의 배분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기존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대한 이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관심도 없고 통제하지도 못하죠. 그런데 저희는 소비자가 직접 알게 하는 방식이에요. ......
생성의 경제는 돈을 주고받으면서 관계망을 두텁게 만드는 작업이에요. 예를 들어 철수 어머니가 하는 떡볶이 집에 가서 떡볶이를 먹으면서 저와 철수 어머니의 관계가 돈독해지죠. 그런데 대량생산에 따른 소비를 하면서는 관계가 형성된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하게 돼요. 그냥 소비일 뿐이죠. 하지만 소비는 누군가에게 돈을 지불해서 그 사람을 먹여 살리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갖게 하는 행위잖아요. 관계망을 만드는 작업이 제가 주목하는 생성의 경제예요.
메이커교육실천 - 이지선
201쪽
메이커페어에서 깨달은 건 테크놀로지, 즉 기술이 반드시 유용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함께 즐길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면 충분한 거였어요. 메이커페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스가 5센트를 넣으면 콧구멍을 쑤시는 로봇이었어요. 별 쓸모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죠.
208쪽
이제 폐쇄적인 관점은 버려야 해요. 가장 중요한 건 '내 안에서 모든 걸 해야 돼'라는 사고방식을 버리는 거예요. 지금은 지킬수록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공개하면 할수록,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강해지죠.
노동환경건강연구소 - 김신범
232쪽
2009년에 석면 베이비파우더 파동이 있었잖아요? 그때 베이비파우더를 만드는 공장의 노동자들은 괜찮았을까요? 만약 노동자들이 석면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책을 수립했더라면 소비자들에게까지 문제가 이어지지 않았겠지요. 노동자만 안전한 세상도, 소비자만 안전한 세상도 불가능해요. 그러니 손을 잡아야 돼요.
244쪽
생협에서 PVC 지우개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었어요. 그후에 그 생협 차원에서 프탈레이트가 없는 지우개를 공동구매했다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그랬어요. 그러면 생협을 이용하지 않는 옆집 아이는 어떡하냐고요. 정보가 없는 사람도, 시간이 없는 사람도 모두 안전한 지우개를 사용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냐고요.
그 질문에 생협 사람들이 학교 앞 문구점에서 안전한 지우개를 팔면 좋겠다고 대답했어요. 맞아요. 그러면 모든 게 해결돼요. 인터넷이나 생협 말고도 마을에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좋은 제품을 팔도록 하는 것, 우리가 노력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지자체에 요구해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발굴하고 판로를 열어주도록 하고요. 학교나 유치원에 좋은 제품을 쓰도록 강제하고요. 나만 홀로 안전할 수는 없어요. 방독면 쓰고 첩첩산중에서 살 거 아니면 말이죠. 친구들과 힘을 합쳐야죠!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 전희경
275쪽
여성주의 의료라니 무슨 의미인가 싶으시죠? ...... 우리가 흔히 큰 병원에서 많이 느끼는 문제들이 있잖아요. 환자는 바라보지 않고 모니터만 보고 얘기한다든지, 설명을 제대로 안 해준다든지, 아픈 것에 대해 환자나 환자 보호자를 야단친다든지 하는 것들이요. ...... "의사인 내가 전문가이니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돼, 환자는 자세한 건 몰라도 돼"라는 식의 태도가 지배하는 의료체계 속에서 우리는 소외를 경험해요.
여성주의는 '세계관'이자 '관점'으로서 우리 일상 전반을 다시 보게 하고, 그동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져왔던 차별들을 발견하게 해줘요. ...... 평등한 관계, 믿을 수 있는 의료 건강 사업소, 서로 돌보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건강할 때 건강을 누리고 아플 때 기꺼이 서로 돌보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281쪽
한국의 복지체계는 '가족을 통한 복지'로 악명(?)이 높습니다. 개인 단위로 복지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아프면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하지만 '아프면 가족밖에 없는' 사회는 정말 무섭고 불안한 사회가 아닐까요? 가족 안에서의 돌봄 중 대부분이 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부정의한 사회이기도 하고요. 나아가 100세 시대에는 누구나 인생의 어떤 시점에 혼자가 되기 마련인데, 그럴 때 '가족밖에' 없다면 모두가 노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점에서, 살림은 나이 들고 아플 것을 걱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단히 현실적인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87쪽
공사영역 모두에서 돌봄이 정의롭게 재분배되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나도 안심하고 돌봄받는 그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90쪽
뭐를 멋지다고 평가하는지, 어떤 모습을 좋게 보는지, 누구의 발언을 경청하는지에 따라 조직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291쪽
아름답고 완벽한 결과물에 매진하다 보면 결국 '선수'끼리만 협동하게 되겠죠. 아마추어들이 잘 운영할 수 있어야 협동조합이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효율성이 자꾸 유혹할 때마다 원칙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렵고 시간도 어래 걸리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협동조합을 협동조합답게 운영할 수 없으니까요.
[네이버 책] 내가 시작한 미래 - 하만조, 김이경,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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