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쪽
나는 패배자가 되는 게 너무 무서웠고, 지금도 두려워. 내가 받은 교육이라고는 어떻게 하면 패배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뿐이었지. 그래서 승리도 하지 않고 패배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법을 익히고 그대로 살고 있어. 그런데 이게 뭐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니.
77쪽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149쪽
우리가 자살을 한다고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사회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점은 안다. 부분적으로는 나와 내 대학 친구 두어 명이 실행에 옮긴 연쇄 자살이 이미 이 사회에 일정 효과를 내고 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나를 전혀 알지 못했던 당신이 여기서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우리는 이미 이 사회에 충격과 공포를 안겼다.
...... 우리가 자살을 한 뒤 사회가 궁극적으로 바뀌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버나드 맬러머드는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항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의했다.
182쪽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190쪽
그런 변화가 완만하게 이뤄졌던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 세대와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194쪽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197쪽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트가 된다.
......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199쪽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199쪽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200쪽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266쪽
우선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이 가장 큰 복수라거나, 우리 세대가 사회의 주도권을 쥐었을 때 변화를 일으키면 된다, 또는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우리 세대가 사회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식의 주장은 자살 선언이 지적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 같습니다.
297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우리가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 종으로서 잘 가꿔진 숲길을 걸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맛본다면, 그 숲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 좋은 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닸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 세연이라면 이런 생각을 한심하다고 여기겠지만 오히려 이제 와서 나는 지금의 내 태도가 어른스러운 것이고, 남은 사람들이나 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신경을 쓴 세연의 태도가 어린아이 같은 거라고 봐.
303쪽
자살 선언은 잘못됐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적절한 반론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그 선언은 역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감염자 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막고 싶었다.
331쪽
열대성 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작가의 말
346쪽
지금은 몇 가지 지점에서 자살선언문을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첫째, 저는 '위대함'은 실제로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
둘째, 저는 현대에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셋째로, 저는 과업과 무관하게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천의 말
349쪽
자기 세대의 서러움을 껴안으려는 젊음의 열망은 시대의 더러움을 제거하려는 의지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역사에 면면한 개혁과 혁명의 요구도 이를테면 오염에 대한 표백의 시도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인 작금의 젊은이들은 원자화된 채 자신 이외에 없애버릴 다른 무엇을 찾지 못한다. 비극과 재앙은 그처럼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 - 김별아(소설가)
[네이버 책] 표백 - 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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