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신혼여행 - 장강명


​28쪽
HJ가 이런 진단에 펄쩍 뛸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우리 부모님은 두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상징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녀를 구속하려는 한국적인 것들, 성차별, 출산과 육아, 유교, 대한민국 그 자체.

29쪽
솔직히 내 부모님과 HJ가 왜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명절에 싫다는 아내를 자기 부모님 댁으로 굳이 데리고 가는 남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보기 싫은 친지들을 만나러 큰집에 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해마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 상담이 급증하고 형제간 폭행으로 누군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꼭 나오는데, 다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친지들을 만나는 걸까.

36쪽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그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의 궁합은 매우 안 좋다. ...... 성격은 비슷하고 가치관이 다르다. 최악의 조합이다.

40쪽
인생은 위험하다. '안전한 삶'에 대한 기대는 망상이다. 안전띠는 매야 한다. 그러나 운전이 무섭다고 어디든 걸어 다니겠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걸어 다니다가도 차에 치여 죽을 수 있다.
자식이 위험에 빠지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모험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모험을 권하는 부모도 없다. 

48쪽
전형적인 한국식 결혼식은 빼빼로데이와 매우 비슷하다. 언젠가부터 점점 호사스러워지고 있고, 장식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으며, 이제는 거대 산업이 되어버렸다.

49쪽
미친 짓거리는 온 사회 구성원이 거기에 협조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더 강화될 뿐이다. ......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명문대와 똥통대'라는 기준을 세웠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기에 '인서울', '수도권', '지방대'라는 기준을 추가했다. 손자 손녀들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어쩌고 하는 긴 디테일을 만든다.

55쪽
...... 거의 모든 한국인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일종의 모금 행사로 여기는 듯했다.

86쪽
이 얼마나 모순인가? 마치 세상의 모든 작은 즐거움들이 상황에 따라 논리를 바꿔가며 나를 살리려 애쓰는 것 같다. HJ의 힘이 부칠 때는 글쓰기가, 글쓰기의 힘이 모자랄 때는 HJ가, 그리고 치킨이라든가 맥주라든가 자전거라든가 재미있는 책이라는가 초여름의 산들바람이든가 잘생긴 개 같은 것들이.
실제로도 많은 사람이 그런 이유로 죽지 않고 사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도 못하면서.

122쪽
패키지 상품에 포함된 공짜 코스라 우습게 여기고 배에 올랐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나는 선셋 세일링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배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부자들이 왜 요트를 타는지 알 것 같았다.
......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생각 덕분에 우리는 애국이니 박애니, 살을 비비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을 넘어선 거대한 사랑을 상상한다. ...... 그리고 그런 거대한 허구를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거대한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거대한 집단 속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142쪽
HJ가 지금보다 20센티미터 정도 키가 더 컸거나, 반대로 그만큼 더 작았거나, 아니면 20킬로그램쯤 살이 더 쪄 있었더라면 나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보다 20센티미터 정도 더 크거나 작지 않고 지금의 키인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그러니 우리가 맺어진 데에는 우연이 크게 작용했다. 우리는 우연의 허락을 받게 사귀게 되었다.

154쪽
우리가 물 밑에 들어갔다 나온 뒤 한동안 말이 없었던 이유는 수면 아래가 정말로 처음 보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신세계를 체험하면 새로운 감각들에 뇌가 놀라게 되고, 익숙한 구세계를 달리 보게 되고, 신세계의 영토만큼 넓어진 머릿속 세계지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게 된다.
어릴 때는 그런 일들이 매일 일어났다. ..... 서른이 되자 그런 경험은 거의 남지 않았다. 어떤 신세계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출산이라든가 창업 같은 것.

187쪽
인간은 가치를 좇는 존재다. 그리고 가치를 좇는 행위 자체가 세상에 폭력적인 질서를 부여한다. 제멋대로 세계를 가치 있는 것, 가치가 덜한 것, 가치 없는 것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그런 질서는 필연적으로 구속과 억압을 만들어낸다.
...... 결혼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사람이 영원한 사랑을 믿으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한눈팔지 않고 상대에게 충실하겠다는 공개 선언이다. 이것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개념이다. 인간은 열정을 금방 잃고, 섹스의 가능성이 있는 타인을 향해 수시로 한눈을 팔며, 오래도록 한 가지 대상에 충실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이 해방된 상태의 인간이다. 결혼은 그런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해서 허구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운명적 사랑, 백년해로라는 개념을. 우리는 운명을 구속함으로써 운명을 만든다.

189쪽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모든 억압에 반대한다'는 말은 그냥 난센스일 뿐이다. 물론 미신적이고 비본질적인 억압, 예단은 얼마를 해 가야 한다는 따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그러나 해방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언제나 가치를 찾는 여정의 한 수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그래서 나는 '비독점적 다자연애' 같은 개념을 우습게 본다. 왜냐하면, 낭만적 사랑이라는 가치는 독점성과 배타성이라는 구속이 있어야 겨우 발생하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 내 생각에 폴리아모리가 어쩌고 하는 인간은 '해방 놀음'에 빠진 철부지거나 욕 안 먹고 바람을 피우고 싶은 위선자 둘 중 하나다.

197쪽
그러자 나는 이 여행이 인생에 대한 비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정의 중반을 넘기고서야 어떻게 하면 시간을 의미 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하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생각하면서.

237쪽
나는 허구에 대해서 생각했다. 때로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삶의 의미라는 구실을 내세워 다가오는 허구들. 나는 그 허구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 허구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심지어 나는 그 일로 돈을 벌려 하고 있다. 허구는 익사에 대한 공포와 수면 위로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바닷물이자 산소통 그 자체다. 어떤 허구에는 다른 허구로 맞서고, 어떤 허구에는 타협하며, 어떤 허구는 이용하고, 어떤 허구에는 의존할 수밖에 없다.

245쪽
앞으로 우리 부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에세이를 써놓은 주제에, 내가 술에 취해 바람을 피우게 될지도 모르고, HJ가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해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2014년 11월에 나는 HJ와 3박 5일 보라카이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훼손되지 않는다. ...... 나는 2014년 11월을 그 이야기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 인생에서 틀림없이 좋았던 부분을 틀림없이 좋은 것으로 지켜준다. 그게 이야기의 힘이다. 그 힘을 얻고 싶어 이 에세이를 쓴다.


[네이버 책] 5년 만에 신혼여행 - 장강명

 

5년 만에 신혼여행

“한국은 싫지만, HJ는 좋다” 《한국이 싫어서》, 《표백》 장강명 첫 에세이 인생 앞에 굴복하지 않는 젊은 부부의 신혼여행 분투기 《5년 만에 신혼여행》은 한겨레문학상, 문학동네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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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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