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쪽
불편한 시선을 받으면 내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괴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애가 있다고 내 입으로 인정하면 남들이 내게 지운 -그리고 기분이 몹시 가라앉는 날이면 나 스스로 짊어지는- 괴물이라는 정체성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될까 봐 두려웠다. ......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땐 주저 없이 도와주면서도 내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한사코 꺼렸다. 내가 그 얘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챈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우리 가족의 일관된 침묵은 '장애아인 나는 괴물'이라는 나의 최악의 두려움을 더욱 굳히는 결과를 낳았다. 장애란 가족들이 입에 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진짜 나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109쪽
우리 세대에는 부모와 장애아 자식 간에, 그 장애가 자식의 인생에 끼칠 영향에 대해 터놓고 대화해보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내 장애인 친구들을 봐도, 뭔가를 애써 숨기려는 듯 가족들이 다 같이 침묵하는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141쪽
"그 나쁜 놈들이 글쎄 집 바로 앞에 세워둔 걸 훔쳐 갔다니까. 그래서 내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됐잖아."
"나도 그런 적 있어." 지미가 맞장구쳤다. "그런데 네 차를 훔쳐 갈 줄은 몰랐다. 장애인 스티커도 붙어 있는데 그렇게. 천하에 나쁜 놈들."
"그러게 말이야. 도둑놈들 주제에 차별은 안 하나 봐."
155쪽
내가 왜 거울을 볼 때마다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는지 나도 모르겠다. 전신 거울이든 화장용 거울이든 그 속에 있는 나는 전혀 나 같지가 않다. 육십여 년을 사는 동안 셀 수 없이 거울을 들여다봤으면 이제는 거기 비친 내 모습에 익숙해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매번 내 모습이 낯설다.
무릎과 발가락은 안쪽으로 휘고 머리와 가슴은 앞으로 구부정해서는 금방이라도 아스팔트의 깨진 곳이나 계단에 걸려 넘어지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냥 엎어질 것만 같은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203쪽
나는 내 몸을 보통 사람들의 신체와 다르고 불완전하며 '고쳐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에 동화되기 전까지는 내 몸을 그저 내 육신, 내가 지니고 태어난 껍질, 완전하고 온전하며 부족한 데 없는 신체로 인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몸에 대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갈등은 그런 상충하는 시각에서 생겨났다. 나 자신에게는 내 몸이 아무렇지 않은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내 몸이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받아온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 나의 몸을 온전한 것으로 보는 자체적인 견해를 붙들고 있기가 한결 쉽다. 그래서 내가 혼자 있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다. 비록 내 방에 혼자 있을 때도 부정적인 견해를 비추는 거울들이 여기저기 버티고 있지만 말이다.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는 그 거울들이 감춰져 있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를 취한다. 이를테면 내가 그린 그림이라든가 내가 쓴 글이 거울 역할을 맡아, 내 본모습과 내가 되고 싶은 모든 모습들-예술 작품, 계속해서 발전해 가는 창의적인 삶, 두려움이나 지나친 판단 없이 자신을 온전히 포용할 줄 아는 여성-을 비춰준다.
230쪽
나는 데이트에 나간 여자로서는 초보였고, 특히 내 장애를 거론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거론한다면 어떤 식으로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 너무 이른 시기에 너무 많이 말해서 일을 망친 경험은 몇 번 있었다. 너무 많이 기다리고 너무 적게 설명해줘서 그르친 경험도 있었다. 딱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히 풀어나간 일은 거의 없었다.
232쪽
나는 남은 고사하고 나 자신에게도 아직 내 전부를 드러내지 못했을뿐더러 죽기 전에 과연 완전한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이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 어떤 정서를 경험하게 만든 스트레스나 외상 같은 부정적 사건에 대해 말이나 글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치료법
250쪽
진의 부정적인 반응은 내 문제라기보다는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내가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태도에 있다는 이 깨달음도 장애인 인권 운동에 가담하면서 비로소 얻게 된 것 중 하나다.
256쪽
참 여러 면에서, 단순하게든 아니면 복잡하게든, 진과 나는 많이 다르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하면서 깨달은 가장 심오한 진리는, 그런 차이를 그냥 흘려 넘기는 것, 우리가 서로 '잘 맞도록' 나 자신이나 그가 변화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그가 나와 똑같이 생각하거나 느낀다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260쪽
진은 실베스터(고양이)가 항상 나만 찾는다고 농담 삼아 투덜거린다. 하지만 그 놀림에는 질투가 배어 있다. 그는 실베스터가 바로 내 몸의 경련 때문에 나를 선호하는 거라고, 마치 물침대에 누운 것 같은 몸의 흔들림에 잠이 잘 와서 좋아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해석이다. 평생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원인이었던 신체적 특징 때문에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다니.
265쪽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장애를 가진 것이 오히려 내게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선택권을 빼앗은 게 아니라 확대해주었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내 정체성을 탐구하고, 인권 운동가가 되고,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게 해줬을 뿐 아니라 내가 누군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을 땐 진정한 사랑마저 찾게 해주었다.
283쪽
내 삶에 눈물을 짜낼 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다. 나를 보고 저렇게 눈물을 찔찔 짜는 사람들을 마주친다는 것 뺴고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대놓고 적대적으로 구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화가 난다. 질질 짜는 사람들을 보면 뒤통수를 퍽 때려주고 싶지만 진짜로 그럴 수는 없고,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현실에 잘 적응한 불구자인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짜내 그 여자의 말을 품위 있게 들어준다. 그래도 투명인간 취급보다는 나를 측은해하는 게 낫잖아 하고 속으로 위로하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311쪽
장애 여성 집단에 들어가자, '유일한 누구'라는 지위가 사라지고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더 이상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장애 여성들이 내게 거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왜곡으로 나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거울이었다. 가끔은 다른 장애 여성들의 몸을 보고 있으면 내가 세상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일까 하는 끔찍한 두려움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나는 이틀이 멀다 하고 마주치는, 혐오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낯선 이들의 시선으로 갑자기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당장 그곳에서 도망치거나 아니면 그들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그러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고 다른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맺고 싶은 유혹은 엄청나게 강했다.
316쪽
또 다른 여권 운동 모임에서 한 장애인 여성이 강연을 마치자마자 청중석에서 비장애인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대견하다는 투로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말했을 때 우리 장애 여성들끼리 '지랄하고 자빠졌네' 하는 눈빛을 주고받은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나온다.
327쪽
로버타는 우리 둘의 심정을 정확히 이렇게 표현했다. "전에는 남의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거부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어. 근데 지금은 필요한 도움을 정확히 요구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
356쪽
멘토들은 그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나 조언가, 심리 치료사가 아니라 역할 모델이나 친구에 더 가까웠다. 자기 삶의 일부를 살짝 보여줌으로써 멘토들은 의도치 않게, 부모나 다른 중요한 주변 어른들 손에 인생의 전망이 억눌려버린 이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
인터뷰에 응한 여자들이 해준 얘기는 기본적으로, 네트워킹 프로젝트를 통해 장애가 있어도 여자로서 인생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 너무 많은 장애 여성이 직장도 없이 근근이 먹고사는 게 걱정이라고 내가 말했더니, 그들은 ...... 요즘 같은 때에는 직장을 못 구한 비장애 여성도 굉장히 많다고 대답했다.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꼭 아무 문제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나의 장애인 자아에게 바치는 글>
369쪽
정상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기를 쓰고 추구하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환영 같은 거야. ...... 문제는 장애가 있는 내 몸이 아닌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문제였던 적은 없었는지도 몰라. 그냥 장애는 직업이나 남자, 누리지 못한 삶에 대한 내 모든 불만을 쏟아낼 허수아비 같은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71쪽
정든 몸뚱이야, 넌 내게 참 잘해줬어. 내가 너에게 한 것보다 훨씬 자비롭게 나를 대해줬지. 우리 둘 중에 네가 더 품위 있고 더 지혜롭구나. 네가 나를 품어주었듯이 이제 나도 너를 품어주고 네 볼품없는 움직임을 한계가 아닌 생명의 신호로 받아들일게.
[네이버 책]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 해릴린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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