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들 - 정소현


●1011호
74쪽
(......)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몸이 반응하는 것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 잠잘 때나 겨우 내려놓을 수 있었기에 나는 흡사 아기를 재우기 위해 키우는 사람처럼 성빈이를 재우는 데 온갖 힘을 썼다.

77쪽
잠에서 깬 남편을 방에 데리고 들어와 그 소리를 같이 들어보려 했지만 남편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들리던 소리가 이상하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를 보느라 힘들어 신경이 곤두서서 환청을 들은 것 같다며 나를 안아 토닥거리며 고생하네, 고맙네 이런 말을 했지만 나는 그런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함께 듣고 싶을 뿐이었다.

79쪽
"안 들리면 신경을 안 써버리면 되는데 제가 어느새 정신을 집중해서 소리를 찾고 있더라고요. 차라리 크게 들리면 민원을 넣으면 되는데, 우리 집에서 너무 작게 들리고, 혹시 나만 듣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너무 괴롭네요."

83쪽
그쪽에서 더 크게 튼 건지 아니면 내가 그 소리를 잘 찾아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노래는 나를 온종일 따라다녔다. 음악 소리가 멀리 있고,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을 뿐이지 실은 괜찮지 않았다.

86쪽
남편은 그 기괴한 소리가 황병기의 <미궁>이라는 연주곡인데, 층간소음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쓰는 방법이라고 했다.

●1111호
93쪽
집중까지 해야 들리는 거면 안 들리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소리가 분명히 들린다고 우겼다.

111쪽
엄마는 몸 떨림이 심해져서 평소에도 거의 누워 지내야 했다. 그 상태에서도 긴 막대를 들어 안방 벽을 가끔 찍었다.

●관리사무소
128쪽
층간소음 갈등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이전에 일했던 신축 대단지 아파트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싸움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시끄럽다고 남의 집 차 지붕에 음식물 쓰레기를 던지거나 창 밑으로 지나가는 이웃을 향해 고추장을 투척하는 일도 있었고, 갈등 중인 집의 현관을 케첩으로 발라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 기막힌 일을 내가 나서서 중재하기도 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였을 뿐 돌아서면 다시 다른 방식으로 곪아 터져버리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소음, 진동 관리법이 있고 층간소음을 조정해주는 기관이 있지만, 갈등을 중재하고 권고할 뿐이지 법적으로 처벌하거나 제재하지는 못했다. 경범죄로 신고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지만, 피해자가 직접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이 쉽지 않은 데다 그 배상 금액 또한 미미하여 화를 돋우기만 할 뿐,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간에 둘 중의 한 집이 떠나야 끝나게 되는 싸움이었다. 가해자는 뻔뻔했고, 피해자는 예민했으며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했다.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그들의 이야기만 듣고는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휘둘리다 보면 서로 상대의 편을 든다고 나를 욕하고 멱살까지 잡았다. 나는 이 오래된 한 동짜리 아파트가 인근 새 아파트들보다 층간소음이 적고 갈등이 없다는 평을 듣고 급여 조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취직했는데 여태껏 겪은 일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겪다니, 어떻게 해도 노년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더러운 꼴을 보게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작품해설
조대한
한데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타인의 파동에 의한 괴로움은 역설적이게도 타인으로부터 홀로 남겨진 진공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네이버 책] 가해자들 - 정소현

 

가해자들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서른한 번째 책 출간!이 책에 대하여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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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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