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쪽
필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본문을 구성하면서 문화운동 대부분에서 어떤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주변부적 삶에 할당된 모욕적인 이름들, 욕이나 진배없는 이름들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이름으로 재전유하여 회복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가련 네그리튀드에 포함된 불어 네그르(검둥이), 펑크족의 펑크(문제아)...... 이는 자신들을 정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현실을 가시화하고 더러운 이름들에 기꺼이 들어가 앉음으로써, 지속되어야 할 싸움의 집요함과 현실의 잔인함을 명시한 것이다. 동시에 언어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시화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너희들은 나에게 나(의 존재와 삶)를 무력화할 이름을 주었지만, 나는 그 이름 덕분에 힘을 얻겠다'라는 전략이다.
38쪽
프랑스의 1968년 5월은 '틀린' 삶을 '다른' 삶으로 인정할 것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요구한 변혁을 압축해서 보여준 시기였다.
50쪽
지금, 이곳의, '나'에게 당면한 문제는 외면하고, 하고 있는 일에나 충실하라는 명령을 의심해야 한다.
94쪽
그러나 '정상'이란 게 사실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고 삶을 옥죄이는 '허구적 신화'라면 히피에 대해 생각을 달리 해야 한다. (......)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이에 상응할 정신적 가르침은 제시하지 못했던 기성세대에 대한 혐오는, 청년 세대에게 '스퀘어sqare(삶의 유형이나 취향에 있어서 보수적이고 틀에 박힌 사람)'가 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게 했다. 물질문명 '밖'의 가능성을 히피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 무소유와 자발적 가난에 근거한 공동체적 삶(코뮌)을 통해 반자본주의적 삶을 구체화했고,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노동하는 대신 함께 먹고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했다.
115쪽
사전적인 의미에서 '사악한, 타락한, 무가치한'이란 뜻인 '펑크punk'는 긍정적인 삶의 가치를 거부하는 청년들의 분노 에너지를 대변한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삶, 주류의 관점에서는 쓰레기나 무가치함을 상징하는 '실패자'들의 삶을 자기화하는 '의식적' 실천이 펑크이다. (......) 이런 점에서 펑크는 상식과 통념을 전복하고 당연한 것들을 비틀어 희화화하는 데에 뛰어나다. (......)
나쁜 것만큼 좋은 것도 억압적이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에 기여하지만, 좋은 것을 억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에게 기여한다.
132쪽
정의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평화와 화해를 촉구하는 백인들의 설교에는, 흑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억압의 당위성을 정당화하려는 지배자의 욕망이 숨어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마룬 공동체의 기독교 해석은 정치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바로 흑인들의 아프리카 귀환운동인 라스타파리아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 머리를 길게 길러 땋아 내린 드레드록 스타일은 백인우월주의 사회에서 라스타파리안들의 투쟁심을 상징하는 결단의 증거였고 (......) 이들은 백인의 직모와 대비되는 머리를 선택하여 백인에 대한 증오심과 흑인의 우수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
1960년대 자메이카의 독립과 함께 태동한 레게 음악은 이러한 라스타파리안과 밀접히 연관된 정치적 음악이다.
205쪽
영웅 중심의 투쟁사나 역사는 약자들이나 이름 없는 자들의 집단적인 연대와 투쟁을 삭제하고 그 위에 고유명사 몇 개를 얹는 손쉬운 기술 방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권익에 헌신한 차베스, 치카노 청년들의 정체성 고취에 헌신한 곤잘레스, 영토 반환 투쟁에 가담한 티헤리나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을 백인의 국가로 오인하는 관성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할 것이다.
240쪽
스톤월항쟁은 전 세계 성소수자들의 자기의식을 바꾸어놓았다. 동성애는 질병이나 기형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삶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의식을 통해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 한 사회의 인권 지수는 퀴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로 가늠된다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48쪽
세계보건기구WHO는 동성애가 에이즈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님을 누차 강조해왔다. 에이즈 감염 원인을 나열한 공개 자료에도 동성애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를 통해 확산되는 에이즈 감염자 80퍼센트가 이성애자라고 한다. (......) 다시 말해서 에이즈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과 약자들 사이를 파고든 질병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의 보수주의적인 통치하에서 에이즈는 게이들의 질병으로 분류되었다. 사회 부적응자와 비정상적인 '변태'들의 질병으로 고착화되자 정부가 에이즈 만연에 굳이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260쪽
이런 면에서 1980년대 미국에서 액트업은 비단 동성애자들만이 아닌 사회의 보호와 관심으로부터 극단으로 내몰린 자들의 결집과 연대의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였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더불어 국제화된 액트업은 개발도상국이나 빈곤국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된 에이즈 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미국 다국적기업, 혹은 제약 회사의 에이즈 신약 독점과 고비용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헌신해왔다. 이들은 빈곤국의 채무를 소멸하고 국제에이즈기금을 설립해 현지에서 에이즈 특효약을 생산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투쟁의 문제에 헌신하고 있다.
267쪽
'침묵=죽음' 프로젝트는 에이즈의 근본 원인이 HIV 감염이 아닌 보다 큰 사회 세력(정부, 기업, 일반 대중)에 있다고 보았다. 이 세력들은 그런 위기에 무관심하거나 그 위기에서 이윤을 얻어내는 자들이었다.
308쪽
게릴라걸스란 이름(과 아이덴티티) 역시 이런 이유에서 만들어졌다. '걸'은 흔히 귀엽고 예쁜 계집애로 마초 남성들이 좋아하는 여성 유형 가운데 하나이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차별에 저항하는 진지한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사회에 만연한 여성 상투형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일견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게릴라걸스는 여성들의 힘을 빼앗고 여성들의 상투적 이미지에 맞춰 여성들을 무력화하려는 남성들의 영향력을 자신들의 정체성(이름)으로 떠안는 능동성, 그러니까 부정적인 단어를 오히려 힘을 강화시키는 용어로 고쳐 사용하는 여유와, 굴복을 의도한 단어를 저항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약자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웃는다'. 유머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지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약자는 웃음을 통해 강자의 엄격함, 진지함, 위선, 잔인함에 굴복하지 않는 저항을 끈질기게 지속할 수 있다.
325쪽
생산과 노동에 매진하는 혹은 매몰된 부류가 아닌 한가하고 '잉여짓'을 일삼는 이들이 속속들이 두리반으로 모여들었다. '쓸모없는 공간'에 '쓸모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새로운 미적 형식을 일상적 행위로서 집어넣은 것이다.
[네이버 책]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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