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니즘 - 김찬호



52쪽
그때 잠깐,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내가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함께 어울리다가 박장대소가 터지는 순간, 그 누구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에고가 멈추고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아를 잊고 대상이나 타인과 일체가 된 경지, 존재가 웃음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사람이 웃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웃음이 된다. 실제로 온몸과 온 마음으로 웃는다. 환희에 사로잡히는 그 절정의 순간, 우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다.

103쪽
정서적 신뢰는 유머가 작동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115쪽
유머는 차이를 재미로 변환시키는 삶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관계의 묘미를 일깨워준다.

128쪽
'person'이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 'persona'에서 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 페르소나는 나쁜 것이 아니다. 가면을 시의적절하게 잘 바꿔 써야 한다. (......) 문제는 하나의 가면만 걸치고 있어서 역할이 경직되는 것이다. 가면이 몸에 고착되어 무대가 바뀌었는데도 적응하지 못한다. (......) 남들보다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허세, 늘 상대방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는 태도 말이다. 그런 관성은 사적 영역을 황폐하게 만들뿐더러, 공적 영역도 비효율의 늪에 빠뜨린다.

134쪽
아이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런 에고는 거슬리지 않는다. 자신의 멋과 능력을 의식하고 나름의 자부심을 세워가는 모습이 맹랑하고 당돌하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어른들의 에고와 달리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일상의 뭇 경험들에 사심 없이 몰입하고, 거기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우리들>(감독: 윤가은)은 ...... 주인공 여자아이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이웃집 형이랑 집에서 놀 때가 많다. 그런데 그 형이 좀 짓궂어서 동생을 늘 괴롭힌다. 그때마다 누나는 속이 상한다. 어느 날 자기가 집에 없는 동안 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화가 치민 누나는 한 소리 한다. 너는 왜 맨날 당하기만 하느냐, 맞고만 있지 말고 너도 때려라. 동생이 대답한다. 그러면 형이 또 때릴 텐데. 누나는 바로 맞받는다. 그럼 너도 또 때리면 되지. 그러자 동생이 태연하게 말한다. "형이 때리면 내가 때리고, 그러면 형이 때리고, 내가 또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135쪽
누구나 내면 한구석에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숨어 있다. 우연한 계기에 그것이 불쑥 솟아오른다. 꽃이나 새나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 강아지나 고양이를 쓰다듬어줄 때, 어린아이와 놀아줄 때, 종이에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릴 때 ......

138쪽
어린아이다움은 정신 건강의 징표일 수 있다. 그것을 잘못 드러내면 유치한 행위가 되고, 잘 드러내면 예술이나 코미디가 된다. ...... 코미디란, 어른의 목소리로 아이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유머 감각은 키우는 것이 아니다. 회복하는 것이다.

145쪽
순응이냐 거부냐 하는 이분법을 넘어 창조의 단계로 나갈 때, 부질없는 고민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166쪽
경직된 도덕주의는 유머를 질식시킨다.

171쪽
재미는커녕 비웃음이나 욕설이 나오는데 살아남기 위해 애써 웃음을 연기해야 한다면, 어느덧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자동 반사로 웃음이 흘러나온다면, 겉과 속이 분리되고 단절되어 존재 불감증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굴하게 처신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직면하기가 괴롭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당한 권위주의에 문제의식을 갖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나도 언젠가 끗발을 과시하리라는 오기로 흐르기 쉽다.

175쪽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연결하고자 하는 소망이 유머 감각의 원천이다.

187쪽
유머는 늘 실패의 리스크가 따르는 지적인 모험이다.

188쪽
"저는 이 동네에서 말이 지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솔직히 아주 짜증 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청중이 웃었다. (데이비드 호킨스, <놓아 버림>, 2013)
'청중의 인간적인 면모를 파고들어 연민을 얻는' 유머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자신의 두려움조차 상대방에게 맡겨버리는 지혜와 용기에서 우러나온다. 그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격려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인데, 이런 전폭적인 신뢰는 스스로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유머 감각을 키우려면 반짝이는 지성과 함께 넉넉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197쪽
유머가 좋은 것은 거짓말을 통해 진심을 더욱 선명하고도 경쾌하게 드러내준다는 데 있다.

208쪽
재기발랄한 지성이 발현하고 통제 불가능한 기운이 번져나가는 것은 권세자에게 위협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웃음에는 혁명의 씨앗이 잠재되어 있다. 

212쪽
풍자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저항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 선언이다. 상대를 대상화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짓눌리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거기에 깔려 있다. 자기의 세계관이 확고할 때 풍자가 가능하다.

216쪽
풍자는 현실 이탈적인 동시에 현실 복귀적이고, 질책인 동시에 사랑이다.

219쪽
자신의 어수룩함이 타인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위로를 받는 것도 유머의 중요한 가치다.

223쪽
체코의 정치인이자 작가인 바출라프 하벨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법이 없다."

238쪽
유머는 관점을 전환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정신의 모험이다. 주어진 세계,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이면을 두루 살펴보는 지성의 운동이다.

242쪽
"환하게 웃는 자만이 현실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다. 맞서 이기는 게 아니라 가볍게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니체가 말했다. '웃어넘기다'라는 말은 있는데, '울어 넘기다' '화내서 넘기다'와 같은 말은 없다. 웃음은 눈앞의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장애물을 넘어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246쪽
언어로 구성되는 리얼리티가 착란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 무無의 세계로 해방된다. 그 카오스는 창조와 발상의 모태가 될 수 있다. '~해야 한다'라는 당위의 속박과 초자아의 억압에서 벗어나, '~하면 어때서?'라는 질문이 가능해진다.

247쪽
논리와 비논리의 이항 대립을 경쾌하게 뛰어넘으면서 의미를 생동시키는 마법이라고 할까.

249쪽
심각함은 유머와 상극이다. 경쾌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는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며 취하는 위압적인 몸짓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기는커녕 분위기만 경직시킨다. 그러다가 엄숙주의의 가면이 벗겨지면 유치한 민낯을 드러내며 경솔한 말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네이버 책] 유머니즘 - 김찬호

 

유머니즘

우리는 어떻게 유머 친화적인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유머의 스펙트럼으로 우리 일상의 다양한 경험을 조망하며 한국 사회의 감정 지형도를 다각도로 살펴보는 『유머니즘』. 유머는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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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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