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쪽
기실 '공감'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시작으로 한 개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그래서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수록 당연히 타인을 섣불리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그래서 공감이라는 것은 타인의 상황을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이해하게끔 하는 결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직접 생생한 현실의 풍경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특수한 사례를 일반화하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깰 수 있고 궁극적으로 더 발전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그 과정을 통해 개인은 유연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부족할 경우, 기존의 고정관념이 이런저런 검증도 없이 신념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어떤 대상을 제대로 모를 때 우리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고정관념에 의존한 판단을 하기 십상인 탓이다.
168쪽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명문대든 아니든 내가 만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이 모든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이해한다.
흔히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한다. 소비사회에서의 개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부류인지를 드러낸다. 오늘날 이십 대들이 대학이라는 맥락을 소비하는 방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이 학력을 근거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갖는 모습은 싸구려를 부끄러워하고 명품을 가졌을 때 당당해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199쪽
한국 대학들의 서열은 단지 수능점수만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다. 경제적 지표로도 나뉘어진다. 각 대학에서 공시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학자금 대출 현황을 확인해보면 서울지역 주요 23개 대학의 학자금 대출자 평균 비율이 재학생 대비 14.5%인데, 서울대와 연세대는 불과 5%대다. 하위 6개 대학은 상위 4대 대학보다 학자금 대출자 비율이 11%가 더 높았다.
<도표 6>에서 나타난 대로 대학서열과 학자금 대출자 비율은 정확히 정비례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 부정하기 힘든 진실을 가르쳐준다. 집안에 돈이 더 많을수록 더 서열이 높은 대학에 간다. 못사는 집 애들은 더 낮은 대학에 가고, 대출을 받다 보니 생활이 더 힘들어진다. 서글픈 악순환이다.
202쪽
학자금대출을 취급하는 대부업체들도 대학들을 1위부터 50위까지 순위 매겨 이에 따라 금리도 다르게 적용하는 세상이다. 똑같이 돈을 빌려도, 학교에 따라서 '이자'를 더 내야 하는 것이다. 누가 더 뒤처질 가능성이 큰가? 답은 뻔하다. 이건 결코 공정한 경쟁이라 할 수 없다.
211쪽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소개된 이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당 부분 '자기 것'이 아닌 요소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개인의 능력과 의지는 그 사람 개인의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샌델이 말하듯 결코 그렇지 않다. 맏이로 태어난 것이 성공에 크게 영향을 주는가 하면,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성공할 확률이 명백히 더 높다. 맏이로 태어나거나 좋은 집안에 태어나는 것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아버지 잘 만난 게 죄는 아니다. 다만 그 덕에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능력주의'만 강조하면, 그 덕이 없었던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겉으로는 동일한 출발선인 것 같아 보여도, 이렇게 여러 상황과 조건에 따라 기회는 균등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214쪽
희망, 그건 개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자연스레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사회가 진정 공정해지면 절로 희망이 부풀기 마련이다. 기회의 균등은 그럴 때 '실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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