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첫 책으로 매우 흥미로운 놈을 맞았다. 대개는 작가나 제목 검색 후에 도서관 책을 뽑아 오는데 간혹 어슬렁거리다 이렇게나 반가운 녀석을 만날 때가 다 있다. 독서량과 별개로 도서관 들락대기는 역시 놓아주기 어려운 취미다.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유난 떤다는 소리를 듣는다'(121쪽)는 한 줄이 그 어떤 축복의 메시지보다도 꿀같다. 위로도 사람을 봐가며 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위로 받고 이로써 기운을 차린다.

 

작가 오찬호. 사회학자란다. 커버에 적힌 소개다.
       1978년에 태어났고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상식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인류의 평등을 방해하는 고정관념을 발견하고 파괴하기 위한 글쓰기가 주특기이다. 여러 책을 집필했으며 (...) 등에 출연하여 '불평불만 사회학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사실이라서 기분 나쁘지 않다.



48쪽
공룡의 존재를 몰랐듯이, 인간의 성적 지향이 다양하다는 걸 이해할 사회적 여건이 없었던 시공간적 배경은 외면한 채, '과거에' 집필된 성서를 현재의 시점에 적용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종교학자 오강남은 일침을 가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에 동성애를 금했기 때문에 동성애를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받드는 성경 레위기 18장 22절이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새 번역에는 '망측한 짓'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 때문에 동성애는 가증한 일, 망측한 짓으로서,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면, 멀리해야 하는 죄악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레위기에 동성애뿐 아니라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던 많은 일들을 금지하고 이런 것들을 어기면 돌로 쳐 죽이거나 기타 처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새우나 바닷가재, 오징어같이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해물을 먹는것(11:10), (...) 키 작은 이, 습진이나 버짐 등 신체의 결함을 가진 이가 제단에 가까이 하는 것(21:20) 등등이다. (...) 동성애가 성경에서 금하는 규율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기타 모든 규율도 다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들고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한겨레> 오강남, "금지된 동성애, 풀려난 바닷가재", 2014.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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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동성애를 찬성할 순 없으니 이제부터 오징어도 먹지 않겠다.' 이런 막말이 새어나오지는 않을지 노파심이 인다. '비판'을 '억지'로 받아 사람 벙찌게 만드는 재주꾼들이 한둘이 아니니 이런 걱정까지 할 판이다. 핵심은 당시와 현재는 '다르다'는 거다. 키가 작거나 습진이 있는 사람도 차별할텐가. 
일상에서의 무논리는 무궁무진하다.

130쪽
북한에 대한 과잉 이미지가 왜 문제인지를 따지면 꼭 "그럼 북한이 나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뚱맞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64쪽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 일할 때 부르는 '필드 홀러'(field holler)라는 일종의 '노동요'였다. '들판에서의 외침'이란 뜻의 '필드 홀러'는 누군가가 독창으로 선창을 하면 나머지가 합창으로 응답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 '한(恨)'의 음악은 후에 등장하는 가스펠(Gpspel), 블루스(Blues), 리듬앤드블루스(Rythm and Blues), 재즈(Jazz) 등 솔뮤직(Soul Music)의 원형이 된다. 그리고 노예들 중 일부는 도망을 쳐서 '머룬'(Maroon) 공동체를 카리브해에 만드는데, 그곳의 종교 의식에 사용된 음악은 나중에 '레게'(Reggae) 장르로 발전한다. 유럽인들이 고즈넉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놓고 밤새 토론을 하면서 '선진적인' 정치경제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커피의 적당한 각성 효과가 유럽의 아티스트들을 자극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슬픈 역사'가 있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커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커피탄타타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노예로 일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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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접할 수 없는 흑인의 '쏘울'에 이런 유래가 있는지 몰랐다. 멋짐이 폭발하는 데 이다지 안타까운 배경이라니! 생뚱맞으나 떠오른다. '너희의 쏘울은 노예로 부린 우리 유로피언이 탄생시켰으니 감사하지 않나' 따위의 망발이 가당한가. 일본은 그러고 있다.



65쪽
그 이후, 식민지 지배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커피 농장에서 흑인들은 노예와 다름없는 경제적 착취를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두 지점을 '끊어서' 이해한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 커피와 노예를 함께 떠올리는 것을 부정한다. 아프리카에서 끌고 간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은 다음 '자유'를 주면 이들이 하루아침에 '판검사'라도 된다는 말인가? 여전히 이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노동을 하며 먹고살아야 한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흑인 노예들은 '빈곤층'이 되었을 뿐이다. 

68쪽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흑인들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역시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지금도 아파하고 있다. 아프리카 지도를 살펴보면 나라간 경계선이 일직선인 경우가 많다. 유럽 열강들이 지도를 쳘펴놓고 자기들 멋대로 분할한 결과다. 그 이후, '내전'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징이 되었다. 유럽 열강의 줄긋기는 원래의 부족을 두 동강 내기도, 또 동질성이 전혀 없는 부족을 합쳐놓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전혀 다른' 250개 민족이 어느 날 '한 국가'가 되었을 정도다. 당연히 서로 간의 갈등이 빈번할수밖에 없고 이는 나라 전체의 발전 저해로 이어진다. 
발전이 늦은 만큼 이들에 대한 세계의 차별은 엄청나다. 특정한 나라(지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와 문화가 만든 풍습은 지구를 누빈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세계를 시끄럽게 하자 한 식당에서 '아프리카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서슴없이 붙이는 곳이 한국이다. 외국인 영어 강사를 채용하면서 '백인'만 가능하다는 인종차별적인 자격 조건을 포함시키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아이들이 흑인 교사를 무서워한다'면서 학원 관계자에게 압박을 가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학부모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어 강사로서 부적격이라고 판단하는 사회가 과연 상식적인 사회일까?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면서 온갖 사차원적인 이론을 늘어놓는다. 과거 '그런 식으로' 차별에 찬성한 나라들의 모습과 똑 닮았다.



83쪽
박정희 정부가 강조한 것은 이순신 정신만이 아니다. '현모양처'로 대변되는 '신사임당'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강조했다. '현모양처'는 조선 시대에는 없었던 말이엇다. <조선왕조실록>에 '현모양처'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양처'라는 말은 가끔 등장하는데, 이는 '어진 아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양인'이라는 신분 출신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명한 어머니, 그리고 지혜로운 아내'라는 상(像)은 일본의 식민지 가족 정책 이데올로기를 통해 만들어진 근대의 산물이다. '충량(忠良) 지순한 황국 여성'을 만들기 위해 강조된 것이 바로 '현모양처'다. 일본은 조선의 전통적인 여성상과 현모양처를 일치시키면서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충의 정신으로 노동하는 남자들에게 헌신하는 아내상이 필요했던 1960년대,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를 대표하는 인물로 우뚝 선다. 
남성은 산업 현장에서 '불만 없이' 죽도록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과 자녀 교육을 '불만 없이' 책임져야지만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독재는 은폐된다.이순신과 신사임당은 이에 적합한 '롤모델'이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을 수 없다.



89쪽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홍세화, <생각의 좌표: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131p, 2009,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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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어려워서 못 하는 걸까 하기 싫어 안 하는 걸까. 혹시 혼용을 즐기는 걸까? 의심스럽다. '다른' 걸 '틀린' 걸로 치부하겠다? 제발 그만두자. 
다른 것과 틀린 것에 대한 무지만큼이나 그 차이를 몰라 부아를 돋우는 두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비판'과 '비난'이다.

151쪽
한국은 '비판'과 '비난'을 동의어로 착각한다. 비판은 '합리적 의심'이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반대를위한 반대'와 같은 '나쁜' 이미지로 이해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의 '과잉 긍정주의'는 이를 부추긴다. '과잉 긍정주의'란 객관적으로 잘못된 것을 문제 삼는 걸 '문제'라 여기는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언급하면, "왜 꼭 부정적으로만 보느냐""는 식의 현문우답이 대표적이다. 
(...) 객관적으로 '잘못된 경우'를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적인 사고' 아닐까. (...) 그런데 사회가 모순적일수록 이런 긍정적 사고의 강요가 범람한다. 그래야지만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회의 톱니바퀴 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 모세혈관을 타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기를 바"라는데, 이때 '긍정'이란 단어가 아주 효과적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면 '잘못된 생각'이라고 면박을 주는 곳에서는 비판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다. 한국에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면,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는 충고를 들어야 하고 '까칠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별거 아닌 것처럼 취급해야지 '쿨한 성격'으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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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비난의 차이는 그 목적에 있다. 비슷한 말을 보면 이해가 쉽다.
⊙ '비난'의 유의어 - 인신공격, 지탄, 책망, 힐난, 손가락질, 원성
    非 나쁘다 비 + 難 싫어하다 난
⊙ '비판'의 유의어 - 비평, 판단, 평, 평론
    批 바로잡다 비 + 判 평하다 평

비난 [네이버사전]

비판 [네이버사전]

못마땅하여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의견을 보태는 것이 비판이다. 

158쪽
조직의 치부를 드러내는 '내부 고발자'를 '고자질쟁이'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가 한국에 많은 건 결속력에 대한 의미 부여가 지나치다는 증거다. 전체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 미덕이 되면 개인의 당연한 요구'는 '이기주의'가 돼버린다. 결국 집단의 가치 안에 논리와 상식은 퇴색한다.
비판의 촉이 거세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먹고사는 문제에만 몰두한다. 비판이 없으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비판은 '때'가 없다. 목격하고 인지하는 순간이 '때'다. 비판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이성'에 충실한 인간의 자격이자, 더 나아가 자신이 동물과 다른 인간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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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 떠는 인간'으로 살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하마터면 돼도 않는 수치심으로 길들여질 뻔했다.

 

[네이버책] 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세상이 이상한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 이상한 세상에 적응이 안 되는 당신을 위한 사회학 특강11년 동안의 대학 사회학 강의를 한 권의 책으로 엮다.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대한민국 20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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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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