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콤비 - 대리만족

 

TV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나는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곤 한다. 불의를 접하면 사정없이 흥분한다. 맛있는 걸 먹을 때면 감탄사를 연발한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만 같다. 그때그때의 감정이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입 밖에 내는 건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뿐이지만, 남의 감정에 민감한 그는 굳이 내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한다. 그만큼 표정이나 말투에서 티가 난다는 얘기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개인적인 감정을 쉽게 털어놓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나는 감정 표현이 요란하고 극단적인 데다가, 대책 없이 솔직하고 거기다 단순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공공장소에서는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그와 둘이 있을 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과감하고 솔직한 표현을 부추기는 쪽이다. 무언가에 목매는 일이 거의 없는 그는 웃는 것 외에는 격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격한 감정이 일지 않는다. 화를 내거나 울거나 흥분하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가 없다. 제삼자처럼 늘 차분하고 태연한 모습이다. 그런 그에게 영화 속 이야기를 내 일처럼 여기고 쉽게 감정을 이입하는 나는 신기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에겐 어떤 감정에 휩싸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태도는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편할 때가 있다. 반면에 슬픔이든 기쁨이든 북받치는 감정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는 어렵다. 그가 직접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절정에 대한 아쉬움. 이는 나의 극단적인 말, 투명한 표정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있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달고 사는 그. 그의 유연한 태도는 내가 꼽는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다. 마치 인생을 달관한 도인 같다.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가짐 덕분에 다른 사람들 역시 그를 경계하지 않는다. 운전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면서 험한 말을 입에 담는 경우가 있다. 남편의 여유는 운전할 때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단 맨 오른쪽, 가장 느린 차선을 택한다. 1차선을 고집하는 나와는 정반대다. 고속도로에서 1, 2, 3차선을 넘나드는 나. 그는 웬만해선 차선을 바꾸는 일이 없다. 추월도 없다. 먼저 가려는 차를 다 보내고 그 뒤를 따라간다. 노란불은 빨간불이나 마찬가지다. 무조건 정지. 어떻게든 신호에 걸리지 않으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운전 습관과는 사뭇 다른 자세다.

 

내가 운전석에 앉으면 급한 성미가 그대로 드러나지만, 조수석에 앉아도 그의 방식이 답답하거나 불만스럽진 않다. 느긋한 방식을 단순한 운전 습관이나 부족한 운전 실력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없는, 도인 같은 여유를 부릴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몸에 배어 있는 양보. 당연히 존경스럽고 흐뭇하다. 예의 없이 끼어드는 운전자를 향해 육두문자를 날리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자세다. 개념을 상실한 운전자들도 많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급하면 어제 가지 그랬냐'는 정도로 웃어넘긴다. 나도 그에게 속도를 내라고 강요하지 않을 뿐더러, 그 또한 나를 의식해 일부러 급하게 차를 몰지도 않는다.

 

내가 운전석에, 그가 조수석에 앉으면 나는 평소보다 좀 더 차분하게 모는 편이다. 그의 잔소리 때문이 아니다. 앙증맞은 표현 방식 때문이다. 앞차와의 간격이 좁다거나 노란불에 신호를 통과할 때, 요리조리 차선을 오갈 때 그가 취하는 행동이 있다. 머리 위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조수석에서 백미러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면서도 나한테는 일체 지적이나 불평을 하지 않는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한 마디 한다. "너무 무서워." 그게 전부다. 참 귀여운 녀석이다. 내 운전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도 않고 불안해도 손잡이만 움켜쥐고 있는 그. 놈은 나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나는 속도를 늦추고 그를 안심시킨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그의 매력에 도취되어 입은 이미 찢어져 있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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