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재능 - 재능의 양면

 

나는 철저한 준비성을 자랑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방 챙기기' 달인이었다. 다음날 시간표에 따라 빠짐없이 교과서를 챙긴다. 과목별 공책이며 선생님이 일러준 준비물까지, 전날 밤 모든 준비를 완료해 놓아야 안심하고 잠이 든다. 어디 가방뿐이겠나. 필통은 더 가관이다. 샤프와 샤프심, 연필과 지우개의 운명은 실과 바늘처럼 묶여 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존재 가치가 없다. 하나는 집에, 하나는 학교에, 이런 일은 절대 없다. 수업은 최장 6교시. 각 시간마다 쓸 연필 6자루에 여분 2자루를 더한다. 필통에는 항상 8자루의 연필이 들어 있다. 물론 8자루 모두 완벽하게 깎여 있다.

 

연필심이 부러질 것에 대비해 여분으로 2자루를 더 준비한 나. 누군가가 연필을 빌려 달라고 하면, 마지막 시간을 제외하고는 - 마지막 시간엔 여분이 없어도 괜찮다 - 하루 한 자루만 빌려 줄 수 있다. 여분 하나쯤은 반드시 필통에 'keep'돼 있어야 한다. 빠듯하면 불안하다. 2교시 때 벌써 하나를 빌려 줬다. 이제 겨우 3교시째. 다른 친구가 또 연필 타령이다. 필통에 뾰족뾰족한 연필들이 4개나 있지 않냐며 하나만 빌려 달란다. 예상치 못한 변고다. 놈같이 융통성 투철한 이에겐 이기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난 더 이상의 여유가 없다. 4, 5, 6교시에 쓸 세 자루에 여분 한 자루. 그야말로 빠듯하다. 실로 철저한 준비성. 이는 때에 따라 욕심 또는 이기심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준비성이 절대적으로 훌륭한 습성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준비성이 부족하다. 초등학교 6, 아니 중고등학교를 포함해 총 12년 동안 가방을 챙겨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가방을 안 메고도 학교에 갈 수 있다.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책은 짝이랑 같이 보면 되고, 연필은 빌리면 된다. 지우개? 교실에 굴러다니는 게 지우개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융통 가능하다.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가 가방과 필통을 애써 미리 준비하지 않는 건,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다. 드물지만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세팅된 필통을 가져갈 때가 있다. 방금 찍어 낸 빳빳한 현금처럼, 기다란 연필 다섯 자루를 죄 깎아 챙긴다. 삐죽한 연필들을 보고 있자니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담스럽다. 과도한 여분이 익숙치 않은 것이다. 그는 이런 날도 흔치 않은데 인심이나 쓰자고 마음 먹는다. "연필 빌려 줄까?"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새 연필을 내민다. , , 뒤에 앉은 아이들이 하나씩 건네 받으며 생각한다. '이 친구는 먼저 손을 내미는, 가진 걸 아낌없이 퍼 주는 정말 착한 아이구나!' 부족한 준비성이 때론 더 긍정적인 평을 부른다.

 

준비성은 그 자체가 상황에 따라 강점과 약점으로 다르게 작용할 뿐 아니라, 상대적인 기능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도 양면성을 드러낸다. 준비 정신이 투철할수록 돌발 및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준비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굳이 그 약점을 개선하지 않아도 뛰어난 반대 기능이 부족함을 메우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일본 라멘 프렌차이즈점에서 일하는 그는 강점을 한껏 살려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고객이 선택한 메뉴를 완성해 홀 직원에게 넘기는 주방 업무. 오늘따라 7번 메뉴가 인기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메뉴에 올리는 고명이 바닥났다. 그의 동료는 홀 직원에게 지시한다. 재료가 떨어졌으니 7번을 주문하는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라고. 이를 깜빡한 홀 직원. 냅다 7번을 주문 받는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해당 재료 없이도 충분히 7번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어서다. 고객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럴 듯하게 완성한다. 레시피를 그대로 따랐다는 듯 거리낌 없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홀로 넘긴다. 한두 가지 재료쯤 바닥나도 대체 재료를 사용하는 등 매끄럽게 일을 진행시키는 재주. 이는 언제든 모든 메뉴가 가능하다는 고객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원칙성은 부족해도 융통성이 뛰어나고, 준비 정신은 약해도 위기 대처 능력이 발달한 덕분이다.

 

그의 재능은 경력이 쌓여 생긴 노련함이 아닌 타고난 강점이다. 그의 동료와 비교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동료는 재료가 한 가지라도 바닥나면 그날 그 메뉴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홀 직원에게도 단단히 일러 둔다. 경력은 놈과 비슷하지만 그런 융통성은 잘 발휘되지도, 발휘하고 싶지도 않다. 그의 부족한 융통성에서 강한 준비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철두철미하게 재료를 준비한다. 적당량 - 식자재는 많이 남아도, 부족해도 문제다 - 을 제때 빠뜨리지 않고 주문한다. 사전 손질이 필요한 재료도 완벽하게 갖춘다. 그의 준비성은 늘 빈틈이 없다. 도중 융통성 발휘가 저조한 만큼 사전 준비성이 철저한 것이다. 그와 그의 동료의 조합은 강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빛을 발한다. 둘이 함께라면 준비와 돌발 문제 해결이 동시에 가능하다. 강점과 약점이 조화롭게 맞물려서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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