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침  우열이 아닌 다름을 깨우친다

 

1-2  준비성과 융통성

 

나는 철저한 준비성을 자랑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방 챙기기' 달인이었다. 다음날 시간표에 따라 빠짐없이 교과서를 챙긴다. 과목별 공책이며 선생님이 일러준 준비물까지, 전날 밤 모든 준비를 완료해 놓아야 안심하고 잠이 든다. 어디 가방뿐이겠나. 필통은 더 가관이다. 샤프와 샤프심, 연필과 지우개의 운명은 실과 바늘처럼 묶여 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존재 가치가 없다. 하나는 집에, 하나는 학교에, 이런 일은 절대 없다. 수업은 최장 6교시. 각 시간마다 쓸 연필 6자루에 여분 2자루를 더한다. 필통에는 항상 8자루의 연필이 들어 있다. 물론 8자루 모두 완벽하게 깎여 있다. 실로 완벽한 준비성이다.

 

놈은 탁월한 융통성을 자랑한다. 그의 융통성 역시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때부터 빛을 발했다. 가방? 6, 아니 중고등학교를 포함해 총 12년 동안 가방 챙긴 기억은 딱히 없다.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가방을 안 메고도 학교에 갈 수 있다.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책은 짝이랑 같이 보면 되고, 연필은 빌리면 된다. 지우개? 교실에 굴러다니는 게 지우개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융통' 가능하다. 가능성은 무한하다.

 

점심시간이다. 여느 때처럼 도시락을 꺼내서 먹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자기 도시락이 없어졌다며 놈 옆에서 시끄럽게 울어 댄다. 가만 보니, 옆에 도시락이 하나 더 있다. 아차 싶다. 보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꺼내 먹었는데, 자기 도시락이 아니었던 거다. 당황했을까? 후회했을까? 아니다. 자기 도시락을 주면서 하루 바꿔 먹으면 그만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본다. 과거 자신의 행동이 어이없을까? 역시 아니다. 도시락 통들이 참 비슷하게들 생겼었다며 충분히 헷갈릴 만했다고 말한다.

 

극도로 발달한 준비성과 융통성. 두 기능의 상대성을 살펴보자. 연필심이 부러질 것에 대비해 여분으로 2자루를 더 준비한 나. 누군가가 연필을 빌려 달라고 하면, 마지막 시간을 제외하고는 - 마지막 시간엔 여분이 없어도 괜찮다 - 하루 한 자루만 빌려 줄 수 있다. 여분 하나쯤은 반드시 필통에 'keep'돼 있어야 한다. 빠듯하면 불안하다. 2교시 때 벌써 하나를 빌려 줬다. 이제 겨우 3교시째. 다른 친구가 또 연필 타령이다. 필통에 뾰족뾰족한 연필들이 4개나 있지 않냐며 하나만 빌려 달란다. 예상치 못한 '변고'. 놈같이 융통성 투철한 이에겐 이기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난 더 이상의 여유가 없다. 4, 5, 6교시에 쓸 세 자루에 여분 한 자루. 그야말로 '빠듯하다'. 실로 완벽한 준비성. 이는 자칫 욕심 또는 이기심으로 비춰진다.

 

놈이 가방과 필통을 애써 미리 준비하지 않는 건,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다. 드물지만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세팅된 필통을 가져갈 때가 있다. 방금 찍어 낸 빳빳한 현금처럼, 기다란 연필 다섯 자루를 죄 깎아 챙긴다. 삐죽한 연필들을 보고 있자니,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담스럽다. 결심한다. 이런 날도 흔치 않은데 인심이나 쓰자! 연필 빌려 줄까? 묻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새 연필을 내민다. , , 뒤에 앉은 아이들이 하나씩 받으면서 생각한다. 이 친구는 먼저 손을 내미는, 가진 걸 아낌없이 퍼 주는 정말 착한 아이구나!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20년 후, 놈은 요리사가 됐다. 손님이 메뉴를 선택하면 완성된 요리를 홀 직원에게 넘긴다. 오늘따라 메뉴7이 인기다. 아니나 다를까, 7에 올리는 고명이 바닥나 버렸다. 놈의 동료는 홀 직원에게 지시한다. 7번 재료 다 떨어져서 못 나가니까 주문 받지 말라고. 깜빡한 홀 직원. 7번을 주문 받는다. 놈은 개의치 않는다. 해당 재료 없이도 7번 요리를 완성할 수 있다. 맛도 거의 똑같다. 손님들? 절대 알 리 없다. 레시피대로 만들었다는 듯 거리낌 없는 표정이다. 당당하게 홀로 패스! 놈은 웬만해선 모든 주문을 들어오는 대로 받는다. 부족한 재료가 있어도 이것저것 대체하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니까. 한 메뉴당 몇 만 원씩 하는 거창한 요리집도 아닌데, 사소한 이유로 주문을 거부하느니 어떻게든 구색을 갖춰 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경력이 쌓여 노련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다. '원래 그렇게 생긴' 거다. 그런 일로 고객의 클레임? 단 한 번도 없었다.

 

놈의 동료는 재료가 하나라도 없으면 그날 그 메뉴는 거기서 끝이다. 홀 직원에게도 단단히 일러 둔다. 경력은 놈과 비슷하지만, 그런 융통성은 잘 발휘되지도, 발휘하고 싶지도 않다. 대신 그는 철두철미하게 재료를 준비한다. 적당량 - 식자재는 많이 남아도, 부족해도 문제다 - , 제때, 빠뜨리지 않고 주문한다. 사전 손질이 필요한 재료도 완벽하게 갖춘다. 그의 사전 준비는 늘 빈틈이 없다. 도중 융통성 발휘가 저조한 만큼 준비성이 철저한 것이다.

 

준비성과 융통성이 드러나는 사례를 구체적인 상황으로 짚어 봤다. 상황에 따라, 직종 및 직무에 따라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기능이 있을 뿐, 준비성과 융통성 자체만을 가지고는 우열을 매길 수 없다. 둘 다 최고 또는 최저 수준인 사람은 없다. 준비성이 90점이면 융통성은 10점에 불과하지만, 준비성이 60점이면 융통성은 40점에 달한다. 때에 따라 훌륭한 능력은 전자일 수도, 후자일 수도 있다. 매 순간 달라진다.

 

 

[발서] 1-1 <로그> Link

[행복계발서] 1-3 우열이 아닌 다름을 깨우친다 <사회성과 독립성>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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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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