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권리와 의무
종교의 논리
"그 소년을 찾아보고 싶지만, 실망하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이대로 묻어 두고 있는 것도 불안합니다. 그 아이가 용서 받을 가치가 있었는지를 아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이런 의심을 품고 있는 저를 용서해 주소서."
"그 소년이 진정 회개했는지, 용서 받을 가치가 있었는지는 감히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걸 주님께 맡기고 그 아이를 위해서 더 기도하세요."
'... 그렇다면, 제가 꼭 용서를 해야 했나요?'
인간에게도 용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용서한 이후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책임 또는 보람을 느낄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 상대의 삶을 지켜보며 섣부른 용서는 아니었는지, 제삼의 피해자를 낳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이는 용서에 뒤따르는 '책임'이다. 본이 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가해자에게 비로소 아량을 베푸는 건 피해자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선택의 권리는 당사자에게 있다. 책임이 뒤따르는 용서만이 용서의 목적에 부합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이 같은 권리를 빼앗고, 의무를 신에게 떠넘기려 한다. 의무와 권리는 동시에 주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무만을 지우기 일쑤다. 용서 받은 자가 또다시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신의 영역이니 관여치 말라는 무책임한 발언도 일삼는다. 신을 무기 삼아 책임을 회피하는 일도, 신에게 권리를 빼앗겨 괴로워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가해자를 방치하고 피해자를 옭아매는 허튼 수작이다.
신부는 어리석게도 '운명'을 거론한다. 당신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가족이었다면 더 행복했겠느냐고 묻는다. 순간 나는 신부의 말이 진리인가 싶다. 그것 역시 불행하겠구나, 가해자도 가여운 존재구나 '착각'할 뻔했다. 이내 신부의 '운명'이란 말이 거슬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 운명 탓에 비극을 맞은 거라면,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어제의 나를 되돌아보며 오늘을 좀 더 바르게 살려는 의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된다. 범죄자의 개과천선도 믿을 게 못된다. 재범의 운명이 주어지면 어차피 또 범죄를 저지를 테니까. 피해자는 결국 자신의 운명, 자신에게 비참히 죽어 갈 운명을 내린 신을 탓해야 하는 걸까. 어불성설이다.
내 마음이 내킬 때까지
다혜는 혜안을 얻었는데, 성당에선 여전히 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들의 논리에 폭발한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예수는 분명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 절박한 순간에도 용서를 바란 건, 피해자인 예수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그들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한다. 자기 죄도 모르는 살인자를 용서하라는 건 말이 안된다!"
다큐를 찍으면서 다혜는 다양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결론 내린다. 스스로 용서하고 싶을 때까지, 시련을 피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때까지, 용서를 미뤄 둔다. 진정한 용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시나리오 메시지 MONZ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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