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12쪽
"아이고 다 듣겄소. 워디서 자고 댕긴 줄도 모르는 여자를 워치케 야하고 재운다요? 베룩이라도 옮으먼 워쩔라고." ......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근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 열일곱의 나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냉큼 꼬리를 내리는 어머니나, 그때 읽고 있던 까뮈의 <이방인>보다 더 낯설었다.

67쪽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는다는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두 시간을 참지 못해 쪼르르 달려와 맥주컵으로 소주를 원샷할 때마다 나는 내심 비웃으며 생각했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94쪽
아버지는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다. 부모가 여든 넘도록 장지 마련은 고사하고 영정사진 찍어둘 생각조차 못한 불효자식이었으나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하였으니 따르면 될 터였다. 역시 유물론은 산뜻해서 좋다. ......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102쪽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141쪽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143쪽
노란머리만 보고 노는 아이라 함부로 판단한 게 미안했다. 고봐라. 내가 뭐랬냐? 믿으랬제?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분명 그렇게 꾸짖을 것이다. 

185쪽
소선생은 전쟁이 나기 전 어느 날 아버지와 다른 제자 한명을 불러 밥을 샀다. "내 제자들 중 느그가 최고다. 긍게 서로 돕고 지내그라." 아버지는 물론 좌익이었고, 다른 제자는 우익이었다. "좌익 시상이 되먼 니가 쟈를 봐주고, 우익 시상이 되먼 니가 쟈를 봐줘라."

193쪽
언제 왔는지 상이용사의 얼굴이 벌써 시뻘겠다. 식전부터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하기야 술꾼에게 시간이 대수랴. 술꾼은 시간을 뛰어넘은 자, 아니 어쩌면 어느 시간에 못 박혀 끊임없이 그 시간으로 회귀하는 자일지 모른다. 작은아버지가 그랬다. 

234쪽
아이와 엄마가 손을 잡고 조문실로 들어섰다. ...... 미국과 싸워 지고 반역자가 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 여인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반색을 할 듯도 싶었다. ...... 절을 하고 일어선 여자의 오른쪽 뺨과 목덜미에 오래 되지 않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몇몇 이주민 여성들의 불행한 가정사가 이 여인에게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이긴 위대한 민족의 서글픈 현주소였다. 

239쪽
아버지가 이 작은 세상에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이 실재하는 양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244쪽
"넘의 딸이 담배 피우먼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먼 호기심이여? 그거이 바로 소시민성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램이 무신 헥멩을 하겄다는 것이여!" 그때 어머니 나이 환갑을 넘었다.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다.

249쪽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252쪽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친인척이 구례에 있고, 칠십년지기 친구들이 구례에 있다. 아버지의 뿌리는 산이 아니다. 

255쪽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우리가 싸워야 할 곳은 산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저 세상이라고. 아버지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아버지였다.이제는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의 유골을 가슴에 품은 채 나는 자수하던 날의 아버지처럼 세상을 향했다. 

266쪽
작가의 말
신이 나를 젊은 날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나는 거부하겠다. 오만했던 청춘의 부끄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견디며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내가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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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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