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 도시, 서울 - 김인정


15쪽
주장할 권리가 없는 소외된 자의 막무가내일지는 몰라도, UN사회권규약은 주거권에 대한 한 가지 조건으로 '익숙한 문화에 살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돈이 없다고 해서 익숙한 곳에 살 수 없다는 것은 기실 철거와 강제이주를 반복해왔던 우리나라 도시 개발의 비정한 학습 효과다. 

30쪽
"쪽방은 월세에 물, 전기 공과금이 다 포함돼 있어요. 그런데 집주인이 뭐 전기를 펑펑 쓰게 해주겠어요? 난로 같은 건 전기 많이 먹는다고 못 쓰게 해요. ......" 

36쪽
놀랍게도 우리 법은 인간이 존엄하게 일상을 영위한 최소한의 충분조건으로 '최저 주거 기준'이라는 것을 두고 있다. '14제곱미터(약4.24평)의 면적, 부엌, 전용 화장실과 목욕 시설'은 주거기본법상 1인 가구의 최저 주거 기준이다. 2015년 제정된 이 법은 "물리적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다"라며 국민의 주거권을 처음으로 법 테두리 안으로 들였다. 그저 바닥에 등을 누일 수 있고,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58쪽
'빈곤 비즈니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으로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

104쪽
쪽방의 평균 평당 임대료 18만2550원. 서울 전체 아파트의 평균 평당 월세인 3만9400원의 4배를 훌쩍 뛰어넘는 임대료를 내면서도 쪽방 주민들은 최소한의 주거 환경도 보장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1.6~6.6제곱미터(0.5~2평) 내외의 좁은 면적에, 밥을 해먹을 공간도, 샤워실이나 화장실도 갖춰져 있지 않다. 

128쪽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날들을 위해서 계속 쓸 것이다. 최신식 스마트폰과 전자기기,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예쁜 카페에서 찍은 사진, 빈틈없이 짜인 파인다이닝(고급 식당) 코스 요리, 휴가철이면 동남아나 유럽으로 떠나는 해외여행 행렬의 이면(이 모든 것은 내가 나의 가난을 숨기기 위해 했던 것들이다)에 가려진 우리 또래의 '보이지 않는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모두가 가난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나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하여.​ 

132쪽
2018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청년 임대주택(역세권 2030 청년주택)을 '빈민아파트'라 폄훼한 안내문이 하나 붙었다. ...... 아직 삽을 뜨지도 않은 건물에 입주할 청년들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너무 쉽게 '잠재적 범죄자' '방탕한 청춘' 등으로 대상화됐다. 

141쪽
'대학가 신쪽방'
1. 노후한 다가구 주택을 리모델링하면서 원래 존재하지 않는 방을 둘이나 셋 만들어 호수를 부여한 원룸.
2. 신축 건물의 경우 법에 맞게 사용 승인을 받은 뒤, 이후 더 많은 가구로 나눠 방을 쪼개 지은 원룸.

160쪽
만족스럽지 못한 집에 살면서 세입자로서 임대인에게 개선을 요구하기보다는 카페, PC방, 도서관, 술집 등 바깥으로 나돌며 자발적으로 '집의 외부화'를 실천하는 온순한 세입자들.

169쪽
...... 전씨가 사는 2층으로 올라가니 복도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인 A4 용지가 세 장 붙어 있었다. '아래층에 사시는 분들을 배려해 늦은 시간에 세탁기 사용을 자제해달라' '늦은 밤에 여자친구와의 애정 행각 소리는 다 들리니 각별히 조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하하, 안 된다는 게 참 많죠. 집이 잘못 지어진 건데 사는 사람들보고 조심하라네요." 

171쪽
가난하다고 해서 취향이 없을까.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 그는 전자키보드를 집어넣었다. 영화를 전공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그가 이 집에서 유일하게 위안을 얻는 물건이다.

183쪽
적어도 내달 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선납해야 묵을 수 있고, 월세도 온전하게 한 달 치를 내야 한다. 이는 고시원과 쪽방/여관/여인숙을 구분 짓는 미묘한 격벽이었다. 그랬던 고시원조차 '일세'를 받기 시작하는 건 ...... '내몰린 이'들을 수용하는 주거 한계선이 고시원까지 올라가버린 것이다. 

190쪽
가난을 숨기는 게 미덕이 된 사회에서, 자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만드는 질문은 불편하다. 이처럼 내밀한 고민과 스스로 마주하기도 쉽지 않다. 사근동 신쪽방에 사는 이들과 심층 인터뷰를 한 뒤, 가장 마지막 질문으로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물론 모두 불쾌한 티를 역력하게 냈다. '나는 지금 가난하지 않으며, 당장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 버티는 중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내면화한 까닭에서다. 여러 사람이 '정신승리'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러나 이는 현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래 가능성을 전제하며 잔인한 착취 구조의 작동을 간과하는 것에 다름없다. ...... 경제적 이익에 눈멀어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윤리 없이 기숙사 신축을 반대하면서도 청년들의 고혈을 빨아 부를 축적하는 '신쪽방' 건물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195쪽
기다리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에, 대부분 현재의 빈곤을 직시하지 않고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저당 잡힌 미래'를 기반으로 실제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제시한 것처럼 우리 사회 청년 3명 중 1명은 '일을 하고 있거나 구직 중인데도' 빈곤 상태에 처해 있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 순간에 되돌아보면 결국 '버티면 데뷔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사이사이에 작동하는 다양한 불공정을 애써 무시하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내가 열심히 해서 정상에 오르는 것' '내가 데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능력주의 신화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197쪽
운 좋게 부모의 보조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르바이트 등 적은 벌이로 주거비를 겨우 마련하는 이에게 집을 구하는 경험은 부족한 예산 내에서 열악한 원룸을 눈으로 봐가며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최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불법 건축물'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간혹 전동수(씨)처럼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제한된 예사능로 살 만한 집을 구하느라 고려 대상에서 가장 먼저 배제해버리는 것이 '불법 여부'였다. 

동자동 사랑방 쪽방촌 지옥고 홈리스행동 쪽방 주거권 빈곤비즈니스 빈곤비지니스


[네이버 책] 착취도시, 서울 - 이혜미

 

착취도시, 서울 : 네이버 도서

네이버 도서 상세정보를 제공합니다.

search.shopping.naver.com

 

Posted by 몽자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