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무겁다. 이마 위쪽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들이 세상 무겁게 느껴진다. 때가 되었다. 미용실을 방문할 때. 편리해서 선택한 숏컷 스타일. 50일에 한번은 전문가의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흠이라면 흠이다. 긴 머리는 매일매일이 고역, 짧은 머리는 수일에 한번 고역이라는 사실로 위안 삼는다.
그렇잖아도 정기적인 헤어샵 방문이 성가신 마당에 IT 강국의 명성에 힘입어 제대로 골칫거리로 자리를 잡을 판이다. 최상급의 실력과 서비스를 내세우는 일부 매장에서만 취해 왔던 예약제 운영이 거의 모든 매장에 퍼져 버렸다. 헤어샵에 따라, 디자이너에 따라 30분, 1시간 단위로 예약을 받는다. 매장을 고르고, 디자이너를 고르고, 시간까지 잡으면 예약 완료. 폰만 수중에 있다면 몇 초만에 해치울 수 있다. 쉽고 빠르다.
마음 먹기가 쉽지 않은 게 함정. 두 군데서 갈팡질팡한다. 예약이 내키지 않고, 후기가 미덥지 않다.
예약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머리 하러 나섰다가 '오늘은 쉽니다'란 팻말에 뒤통수 맞고 돌아서지 않아도 되고, 금방 된다 잠깐만 앉아 계시라는 말만 믿고 금방이란 도대체 얼만큼을 얘기하는 건지 궁금해하며 그냥 가버릴까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아도 된다. 5시 59분에 들어가 6시 예약한 사람입니다, 하고 예약한 서비스만 받고 나서면 되는 깔끔한 시스템이다. 물론 예약한 이후에야 경험할 수 있는 효율성이다.
주말 아침에 눈을 뜬다. 50일이 지나도 숏컷은 숏컷이다. 남들 보기엔 여전히 '너무' 짧은 머리카락. 나한테만 천근만근이다. 덜어내고 싶다. 폰을 집는다. 최근에 방문한 3개 매장을 둘러본다. 체리 살롱, 디자이너 세라, 오늘 날짜 선택, 확인, 예약 가능한 시간이 없습니다. 뭐 주말이니 그럴 수 있지. 어차피 여긴 너무 비싸. K뷰티 헤어, 규리 원장, 오늘 내일 모레 글피 전부 비활성화, 수요일 예약 가능, 가능 시간 오전 10시, 오전 할인 제공해드려요, 연차를 내야 하나 젠장, 여기도 불가. 난 '지금' 머리가 무거운데, 전문가 여럿이 함께 집도해야 하는 대수술도 아닌데, 어째서 예약이 필수인 건지.
황금 같은 주말, 시간을 쪼개고 쪼개 헤어샵 예약을 마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번 주는 나의 게으름을 탓하고 말자. 무거워 봤자 머리카락, 며칠일랑 못 버틸까. 주중 틈틈이 예약 페이지를 들락거린다. 부대껴도 수요일 마지막 타임이 좋을까, 한갓지게 금요일 퇴근 타임이 좋을까, 산뜻하게 토요일 첫 타임이 좋을까. 자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순간 전문가의 손길이 훑고 지나가 주면 그토록 짜릿하고 가뿐한 일이 없기에, 재고 또 잰다. 클라이맥스를 노린다. 금요일 출근 후에야 정신을 차린다. 예약 가능한 시간은 또, 반도 안 남았다. 시간과 노력을 아끼는 건지, 주중 줄줄 흘리는 건지, 예약시스템이 불러온 일상의 변화가 달갑지 않다.
예약 시 선불 결제가 필수적인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거저 가능하다. 부담없이 예약했다 취소할 수 있단 얘기다. 그런데 어디, 그게 그런가. 결제 없이 예약했다가 취소 수수료 없이 철회가 가능하다고 해서 부담이 없진 않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다. 취소 위험을 감수하고 예약을 열어 둔 매장 입장을 생각하면 최선을 다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예약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예약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을 수밖에. 무거운 머리를 보름쯤 달고 다닐 수밖에. 이제나저제나 틈틈이 타이밍을 노리다 지칠 수밖에.
도시를 넘어 이사한 지 만 3년. 그간 헤어샵에 스무 번쯤 들락거렸을 것이다. 절반, 그러니까 열 번가량은 40분쯤 차를 몰아 이전에 살던 '시'로 향했다. 단골로 삼을 만한 매장 발굴하기가 쉽지 않다. 소비자에게 최고의 지침이 되어줄 것처럼 기대감을 키웠던 '후기 시스템'은 할인을 대가로 고객을 꾀어 쌓아올린 양적 승부수일 뿐더러, 보다 싼 전셋값에 발을 들인 곳이어서 안타깝지만 연고도 전무하다. 지인 찬스 불가. 직접 머리를 들어밀어 봐야 한다. 소감은 대부분 그저그렇네 정도. 재예약을 두고 결정장애를 보이는 이유다.
25살부터 10년 정도 다닌 헤어샵이 있었다. 그리 드문 이름이 아니기도 하고, 여전히 팬심을 유지하고 있으니 실명을 밝혀도 되지 않을까. 그 이름도 찬란한 빛나 선생님. 육아차 떠나셨고, 나는 그 후로 8년째 제2의 빛나 찾아 삼매경 중이다. 남편도 같은 처지. 지하철로 왕복 2시간을 오가며 빛나는 손기술을 누렸더랬다. 갈 곳 잃은 우린 급기야 바리캉을 샀다. 군대에서 실력 발휘 좀 했다는 남편은 내 머리는 물론, 제 머리까지 돌려 깎는다. 나는 잊을 만하면 빛나는 손기술을 찾아 나서고, 남편은 이사 후 다시 자급자족에 들어간 상태.
걸어서 7분 거리에 새로 미용실이 들어섰다. 꼭 한번 가보리라 눈독 들이던 고깃집 옆. 덩달아 호감이 쏠린다. 토요일 아침. 이제 뒷머리까지 거슬린다. 엄지손가락 한마디에 가까운 길이. 미용실이 시급하다. 두어 군데를 돌다 고깃집 옆 '그 살롱'을 검색한다. 넓게 펼쳐진 선택지. 여덟 타임이 비어 있다. 한가한 걸 기뻐해서 죄송하다, 짧은 사과를 마치고 냅다 예약을 잡는다. 50% 선불 결제도 주저 않고.
4시간 뒤. 예약 장소 도착. 정확히 20분 소요. 컷 완료. 디자이너의 속도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본인의 머리를 따뜻하고 향기로운 손길로 다뤄주길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 취향이다. 난 차가운 손으로 가위를 성큼성큼 들이대면서 마음이 앞서 빗도 두어 번 바닥에 떨어트려주는 디자이너를 선호한다. 손님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보다 본인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신속히 서비스 제공을 마치려는 적극성을 응원한다. 다행히 들어맞는 취향. 예약도 필수는 아니란다. 8년 방황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려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면 헤어샵 찾기가 더 힘들다. 후기에 등장하는 사진은 대부분 단가가 높은 염색, 펌 위주다. 숏컷도 엄연히 스타일 중 하나이건만, 간판으로 내세우기엔 영 시답지 않은가 보다. 컷 전문 헤어샵을 찾기 어렵다고 해서, 그 어떤 할인 행사에도 컷은 절대 끼워주지 않는다고 해서 추구하는 스타일을 포기할 순 없다. 어딜 가나 소수자는 있다. 너무 자주 소수자 아닌가 싶긴 해도, 자주이다 보니 내 자리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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