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몇 시냐, 약속한 시간 한참 지난 거 안 보이냐, 눈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벽시계는 툭하면 삿대질을 당하고, 손목시계는 걸핏하면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문질, 안면 가격을 당한다. 시계 입장에선 묵묵히 할 일 하다 봉변 맞는 격. 전 아무 말 안 했는데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몇 시에 무얼 하기로 했는지 충분히 합의가 된 경우에도 상대가 손등 위를 탁탁 두들기면 그것만큼 꼴 보기 싫을 때가 없다.
에둘러 말하는 문화는 '때로' 운치 있지만 '자주' 비겁해 보인다. 자녀를 훈계하면서 엄마는 아빠 핑계, 아빠는 엄마 핑계를 댄다. 직속 상사는 윗선을 끌어들이고, 친구는 다른 칭구를 핑계 삼는다. 아빠는 이해하지, 근데 엄마가 걱정하잖아. 엄마는 괜찮은데 아빠가 워낙 강경하잖니. 일개 과장인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부장님이 내린 오더인데 어쩌겠어. 그 친구 부르는 거 나는 상관없는데 땡별이가 싫어할걸. 제삼자 끌어들이기. 미리 양해를 구하고 솔직히 표현하자면, 역겹다.
양으로 밀어부치는 경우도 있다. 다수를 강조한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니 말이 맞나 내 말이 맞나, 내 말이 맞다는 사람이 더 많을걸, 진짜 물어보자니까. 니 친구 중에 너 같은 애가 몇이나 되니, 너만 유별나게 왜 그러니. 다른 동기들 누구 하나 자네처럼 하는 사람 있나, 제발 좀 튀지 말자. 우리나라 중소기업 열에 아홉은 다 그렇죠, 안 그런 데 있으면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장사 하루이틀 합니까, 이 업계가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연륜과 인내력은 과연 비례하는가. 시간은 약인가. 그럴 리가. 못이 박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순진한 바람일 뿐이다. 누군가 저 멀리서 운만 떼도, 뗄 기미만 보여도 손, 발, 뇌는 일시정지. 정녕 또 그 레퍼토리란 말인가. 처음이라 신선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 화법은 한 번 쓰기 시작하면 100번은 들먹어야 속이 후련한, 뭐 그런 특수성이라도 있는 걸까. 그 화법과 의리라도 맺은 걸까, 잊을 만하면 언급하겠다고?
제삼자 내세우기 화법. 그 심리를 이해해보려 머리를 굴린다. 생존 본능. 내가 나서기엔 두려우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혹은 나보다 더 강한 선호 경향을 보이는 이를 언급하는 것일 테다. 원하는 방향의 결론은 얻되 나는 채무감 없이 홀가분해질 수 있다(는 착각). 꿩 먹고 알 먹고. 잘된 걸까. 글쎄.
과장이 부장 핑계를 댄다. 직원은 핑계임을 안다. 과장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를 부장 운운하며 중언부언하고 있으니 안 들키기가 더 어렵지 않겠나. 비슷한 일은 반복된다. 언제나 부장님이 원하시는 바란다. 그러려니 한다. 과장에 대한 직원의 신뢰는 사라진다. 무슨 말을 해도 마찬가지. 회복은, 어렵다.
실제로 부장의 보고서 수정 지시가 있었다면, 이 역시 난감하다. 이때부터 과장은 '패싱' 대상이다. 부장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과장의 지시만으로 직원은 보고서를 수정해야 마땅(?)하다. 본인이 만족할 만한 보고서가 아니라고 말하면 직원이 귓등으로도 안 듣겠다 싶었던 걸까. 과장은 본인의 권위를 스스로 밥 말아 드셔 버렸다. 앞으로 부장 얘기 없이, 과연 씨알이 먹히려나.
본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그 자체로서 이해 또는 비판 받는 경험을 권한다. 다른 사람과 같으니 인정해 달라거나 나뿐 아니라 다수가 그러하니 옳다고, 그런 식으로 주장하지 말자. 벽에 걸린 '시계'처럼 가만 있다 봉변 당할 '제삼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다른 이의 의견을 들고 나와서는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다. 비난이 두려워 사랑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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