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쪽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이유는, 내가 한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44쪽
거울은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오로지 거울 자신만 빼고.
47쪽
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건 대부분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50쪽
친구들이 아이를 가지기 시작하고, 어떤 생명을 계속 기켜 주기 위해 들이는 그 영웅적인 노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요구하기만 하는 어떤 존재를 돌봐야 하는 그 끝없이 소모적인 일을 이해한 후에는, 나의 어머니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시기에 그 모든 일을 했음을 깨달았다. ...... 내가 어머니를 돌본 이유는 그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시간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53쪽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54쪽
학생들에게 본인을 계속 지탱해 줄 장소를 찾기 시작해야 할 나이라고 이야기했다. 장소가 사람보다 더 믿을 만하고, 가끔은 사람보다 더 오래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고 말이다.
58쪽
사람들이 '어머니'나 '아버지'라고 말할 때, 그건 서로 다른 세 가지 현상을 일컫는다. 우선 당신을 만들고 어린 시절 늘 당신 위에 있는 거인이 있다. 그다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지하게 되는, 때때로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스스로 내면화한 부모님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달래고, 도망치고, 이해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이 세 모습이 한데 뒤섞여 혼란스럽고 서로 모순되는 삼위일체를 만들어 낸다.
69쪽
'동결하다(freeze)'라는 단어가 현대 영어에서는 '시간을 멈추다, 진행을 멈추다, 영상을 멈추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84쪽
자신을 보지 않는 방식은 정교하다. 분열, 투사, 기만, 망각, 정당화 등 많은 방식으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이라는 장애물을, 우리 자신의 얼굴을 한 괴물이 숨어 있는 미로를 피해 간다.
85쪽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100쪽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101쪽
중국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면 지구 반대편으로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읽기와 쓰기의 고독이 지닌 깊이가 나를 반대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게 했다. 한때 그렇게 가난했던 이에겐 깜짝 놀랄 만큼의 풍요로움이었다.
121쪽
젊을 때 읽었던 마르키 드 사드의 문장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아! 늘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시간에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 살덩이든 저 살덩이든, 오늘은 한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지만 내일이면 1000마리의 곤충으로 변해 버릴 것을?" 사드에게 중요했던 이 질문 혹은 탄식은 일반적으로 분해라고 상상하는 어떤 과정이 또한 변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썩어 가는 것도 다른 생명으로 변신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무언가가 되어 가면서 동시에 무언가가 사라지는 격렬한 과정의 일부이다. 그것은 잔인하고, 죽음이며 또한 삶이다. 살아 있는 것은 거의 모두 다른 생명의 죽음 덕분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퇴화이면서 재생이다.
125쪽
작가 본인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125쪽
요리를 보통 삶이라 보면, 절임을 만드는 건 시간을 지연시키는 일, 금방 상하는 과일을 거의 무한하게 유지시키는 기술이다. ...... 어쩌면 절임이란 역사가의 요구와 요리사의 능력이 만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134쪽
글로는 비눗방울의 덧없음만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림에서는 찰나에만 존재하는 비눗방울과 그 아름다움이 지속된다.
151쪽
나병은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면 환자들은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환자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 손가락과 발가락, 발, 손을 베이고, 화상을 입고, 멍들게 하고, 벗겨지게 하다가, 결국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 폴 브랜드는 이렇게 적었다. "어떤 때는 내가, 아이들에게 자기 손발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아무 감각이 없는 신체 부위라고 해도 친절하게 다뤄야 한다는 이상한 부탁을 하는 교장선생님이 된 것 같았다.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전에는 그 아이들이 부주의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158쪽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다른이의 것까지 느끼는 이들은 확장할 것이며, 모든 존재에 공감하는 이들의 경계는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홀로 있지 않으며, 외롭지 않고, 우리 자신이라는 섬에 발이 묶여 버린 이들과 달리 취약하지 않다. ...... 무감각이 자아의 경계를 수축시키는 것이라면,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161쪽
나병 환자들은 단지 신체적인 감각만을 잃었을 뿐이다. 종종 그들의 고통 주변에서 도덕적, 감정적 감각을 잃어버리는 이는 나머지 사람, 우리다.
179쪽
나는 메스를 든 신들에게 책 선물을 제물로 바쳤다. 의사들과 수간호사에게 주었던 이런 선물은 비록 사람들이 일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기는 하지만, 돈이 열정과 진심으로 일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어떤 인정의 표시였다. 열정과 진심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오직 덤으로만 주어지는 선물이고 그리고 매우 많은 분야에서 발견된다.
180쪽
그래버(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래버)에 따르면 화폐가 출현하기 전, 사람들은 물물교환이 아니라 그저 필요에 따라 혹은 물건의 유무에 따라 이것저것 주고받았을 뿐이다. 서로 빚을 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고, 그런 주고받음이 불완전하게나마 계속 이어지며 공동체는 유지되었다. 화폐는 이전 체제에서는 완결될 필요가 없었던 거래, 마치 몸 안의 순환계처럼 작용하던 그 주고받음을 완결짓기 위해, 그를 통해 단절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안되었다. 화폐는 우리의 몸들을 따로 떨어지게 하고, 우리가 그렇게 떨어져야 한다고 알려 주는 것 같다.
181쪽
호의는 비상식량, 비가 올 때나 겨울, 수확이 없는 시기를 대비해 비축해 두는 식량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상상했던 것보다 많음을 발견하는 일은 뿌듯하다.
224쪽
국가적인 위기든 단 한 사람의 개인적인 위기든,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위기가 있는 것이다.
232쪽
그 이어짐이 비극인 이유는 철새와 함께 이동하는 독성 물질과 기후변화 때문이다. 그 독성 물질은 곰을 자웅동체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린란드 여성의 모유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유해 폐기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수반카가 말했다. "왜냐하면 전 세계에서 시작되는 독성 물질의 여정이 북극에서 끝나거든요. 그러니까 제 작업은 사실 이런 상호 연관성에 대한 비유인 셈이죠."
248쪽
통계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에서는 사람들의 사망 원인 중 1위가 기상 재해다.
252쪽
불교에서 정신의 낙원을 뜻하는 나르바나는 촛불이나 불꽃을 '불어서 끄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건 열정이 가진 열기를 끄는 것, 숨을 길게 내쉬며 흘려보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259쪽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269쪽
냉기는 안정된 것이고, 온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273쪽
사막에서 생활하다 보면 그늘을, 그림자와 어둠을 사랑하게 된다.
275쪽
이 미로에서는 암흑이 열려 있고, 창백한 석고 벽면은 막혀 있다. <진로>(엘린, Path)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는 것, 말 그대로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 길이 꺾인 걸까. 한 가지 길밖에 없는 걸까.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출구와 입구가 같은 걸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정 중에 자신의 손과 눈 그리고 발로 찾아야 한다.
...... 미로 속 여정의 끝은 사람들의 짐작과 달리 한가운데가 아니라, 다시 입구로 나오는 것이다. 출발했던 곳이 또한 진짜 끝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례나 모험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집과 같다. 미로 안에서는 볼품없던 모퉁이나 여백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여정은 어딘가로 들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 나오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281쪽
심지어 황무지를 여행할 때도 여정은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나 중요성 혹은 즐거움에 따라 결정되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이 만든 신발이나 지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283쪽
할 말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284쪽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세상은 삶을 온통 편안한 것과 익숙한 것만 비춰 주는 거울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고, 그 반대의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위험은 있다.
284쪽
듣는다는 것은 귓속의 미로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게 허락하는 것이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 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다. 이 듣는다는 행위 말이다. 이는 당신이 각각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당신의 고유한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게 당신의 우주에서 그 자리를 찾아 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친절, 동정, 너그러움 같은 것은 마치 순전히 감정의 미덕인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미덕이다. ...... 이런 상상을 통한 들어감은 구체적인 대상을 가정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진다. 굶주리는 어린이 한 명의 입장은 쉽게 상상이 되지만 수백 만 명이 굶주리고 있는 지역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가끔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큰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 감정이입은 당신이 무언가에 관심을 기울일 때, 그것을 보살피며 그곳에 가보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나서는 여정이다.
301쪽
우리는 정상적인 것과 미친 것, 좋은 것과 파괴적인 것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 마치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듯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301쪽
우선 나부터가 우회적으로 식인을 한 셈이다. 내 몸에는 알로덤이라는 재생 조직이 붙어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피부에서 떼어 온 조각이다. ...... 나는 식인 풍습 역시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얼마만큼, 어떤 방법으로 식인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취하고 있는 그 타인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취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그 덕분에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고 악몽을 꾼다.
325쪽
내가 어머니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던 시기는, 나의 기억이 시작되기 전과 어머니의 기억이 희미해진 후였다.
352쪽
물리치료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성 통증 같은 경우에도 환자가 그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363쪽
에세이 작가 역시 깔끔한 결말을 제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배를 해변으로 올려 선창에 묶고, 드넓은 바다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다.
368쪽
그랜드캐니언은 물이 바위를 제압한, 약함이 강함을 넘어선 놀라운 예이다.
[네이버 책]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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