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 309동1201호


​66쪽
아마도 내가, 혹은 내 또래의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 들이 겪는 외로움의 근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반(半)사회적인 인간이다.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듯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반(反)사회적인 인간이다. 다른 노동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표면적으로 노동하고, 사회가 원하는 소득과 소비 기준, 그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일주일에 네 시간 노동(강의)하고 월급을 받아 가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한다. 강의 준비, 과제 첨삭, 개인 면담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더 길지만,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회성의 결여, 사회에서 함께 동시하고 있으나 동시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동시성의 비동시성, 이러한 외로움은 연애나 우정이나 가족애 같은 것으로는 극복되지 않는다. '사회적'이지 못한 존재는, 외롭다.

74쪽
함께 꿈꾸던 친구들은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자리에서 보통 자신의 과거를 철없던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 '취미'로 '꿈'을 격하한다. 괜찮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비난할 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인'이 되었음을 축하해야 한다. 하지만 허벌(허범욱)과 같은, 혹은 제도권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여전히 반사회적 인간인 나와 같은 인간들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철없음으로 여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그것은 서로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후진 기어를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진행형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도 어쨌든 자신이 선택한 도로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123쪽
많은 동료 연구자들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운동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누구보다도 즐거워하지만, 반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대개 그만둔다. 그것을 온전히 즐길 만한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논문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능력이 무척 탁월하다. 배드민턴 모임은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고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각자가 그마저도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구실과 자동차 트렁크에 배드민턴 라켓을 굳이 놓아두고서도,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래서 한 학기 내내 소원한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의 하시죠, 하는 한마디에 다시 모임이 결성될 것이다. 그렇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128쪽
그런데, '노동'에는 사람을 '성찰'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타인에 대한 어떠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또 다른 나를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저에게 내재된 어떤 원초적 욕구'였던 것 같습니다. 연구실의 동료 연구자들이 무척 애틋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의실에서, 학생 하나하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두 존중할 만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어떠한 자각, 이것은 몸을 수고롭게 해 '노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느껴보지 못했을 경험이자 감정입니다. 그에 더해 노동의 시공간은, 인간과 나 자신에 대한 사유를 놀랄만큼 확장해주었습니다. 워시장에서 설거지를 하며 정말 많은 논문의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가끔은 어떤 문단 내용이 통째로 떠올라 꾹꾹 담아두었다가 퇴근하자마자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어떠한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후 어떠한 삶을 살든, 몸이 허락하는 적당한 '육체 노동'을 반드시 하며 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지금의 성찰이 그저 일시적 감정에 그치지 않도록, 값싼 자기만족이나 허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뒤늦게나마 글이 아닌 몸으로 배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150쪽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교학상장'이라는 단어를 기억해냈다. "가르침과 배움은 함께 성장한다"라는 의미의 사자성어다. ...... 굳이 어려운 철학책을 애써 들추어보거나 하버드 교수의 강의록을 곁에 두지 않아도, 인문학은 언제나 내 주변의 평범한 집단 지성 안에 있음을 나는 믿는다.

127쪽
내가 기억하는 열정적인 교수자들은 대부분 '혼자' 열정적이었다. ...... 나는 강단에서 언제나 뜨거워야 하지만, 동시에 가장 차갑게 사유해야 하는 존재다. ...... 나의 욕심을 열정으로 미화하지 않으려 한다.

164쪽
강의실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학생들이 '반짝반짝'할 때다. 좁은 시야에 갇힌 몇몇이 아닌 모든 학생들의 반짝임을 내가 느낄 수 있을 때다. 그것은 어떤 감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가능성을 자각하고, 치열하게 사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모두를 반짝이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고, 모두를 갑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168쪽
무거운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쉽고, 무겁게 풀어나가는 것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성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학생들이 자기 주변에서 문제 탐색을 시작해 그 어떤 사회적 문제든 주변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기를 바랐다. 주변의 가장 작고 가벼운 문제를 무거운 영역으로 치환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인문학적 성찰 방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169쪽
나는 토론의 승자가 되는 것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부분은 제가 부족했는데 덕분에 더 좋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177쪽
누구나 정답을 말하고 점수를 획득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정답이든 오답이든, 그에 대처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함을 모두가 언젠가 체험하게 될 것이다.

182쪽
네이버와 다음 등 유명 포털을 통해 서비스되는 웹툰들조차 표준어 문법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작가마다 편차는 있지만 한 편당 10개에서 100개까지 다양한 오류가 드러난다. 구어체나 관용적 표현을 제외하고 접근해도 그렇다. 하루 이용자만 수백만에 이르는 거대 포털들이, 어떠한 맞춤법 검수도 없이 그저 작가의 개별 역량에 모두 맡기고 있는 셈이다. 웹툰 텍스트에 무방비로 노출된 청소년들이 잘못된 맞춤법을 그대로 체득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185쪽
"여러분은 국문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결합식을 외울 필요는 없고 원리만 간단히 이해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저는 카톡을 보내거나 할 때 "봬요"라고 하지 않고 "뵈어요"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뵈요"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내 주변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소통하려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대학에서 더욱 중요한 지식을 계속 배워나갈 것입니다. 점점 부모님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질 테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곧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봬요"를 "뵈어요"로 풀어 쓰는 것처럼, 배운 것을 활용해 모두와 소통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주변에서 시작하는 인문학입니다."

188쪽
많은 학생들이 더 이상 진영의 논리나 그간의 '주의'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이 상식과 합리라 믿는 것들을 모두 수용해내는 태도를 보인다. ...... 많은 학생들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성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사상사적 학습에 노출될 일이 적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성이 세대에 따라 부분적으로나마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193쪽
많은 시간강사들에게 강의는 부족하나마 당장 오늘의 생계를 해결해주는 수단이고, 연구는 내일의 생계를 위한 희망이 된다. ...... 그런데 살다 보면 대개 '강의>연구'로 기울어진다. 많은 시간강사들이 연구실에서 정작 논문은 열어보지 못한 채, 강의 준비나 학생들의 과제물 평가와 첨삭에 바쁘다.

194쪽
사실 '연구'는 무척이나 모호하고, 허울 좋고, 비사회적인 단어다. 노동 행위로 인정받기 힘들뿐더러, 보수가 지급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하지만 연구자에게 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숭고'가 아닌 '생계'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래야 강의에 충실할 수 있다.

197쪽
교수님의 논문도 검색해주세요, 하는 학생의 요구를 누군가는 무례함이나 당돌함으로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몇 년간 한 편의 논문도 쓰지 않고 강의실에 서는 행위가 오히려 학생들에게 무례한 것이다.

198쪽
특히 강의실에서 느끼는 당당함도, 부끄러움도, 대학 인력시장의 이력서에는 남지 않겠지만, 스스로의 이력서에는 남는다.

209
그동안 나는 사과를 할 때면 '그런데'라는 부사를 말미에 붙여 내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고, 변호해왔다. 결국 '그게 사과야?' 하는 반응을 이끌어내고, '미안하다고 했으면 됐지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해?' 하고 적반하장으로 맞받아쳤다. 지금까지 나는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변명'을 했고 '핑계'를 대온 것이다. 나의 잘못된 발화에 상처 받았을 이들이 점점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사과를 하는 데에는 '미안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하는 두 마디면 충분한 것이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온전히 사과하는 법에 대해 배웠다.
그러고 보면, 지금 시대에 '사과'라는 것은 참 흔한 행위가 되어버렸다. SNS에는 어느 연예인의 사과문이 항상 올라오고, 여러 정치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사과 담화를 발표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미안'과 '죄송'의 수사를 듣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다. 특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는 구절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참 비겁한 표현이다. '미안하다'라고 하면 될 것을 '하게 생각한다'라고 해서 사과하는 주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자신을 행위의 주체가 아닌 제 3자로 묘사해 뒤로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자기 정당화의 과정을 반드시 거치고, 공익 또는 국익을 위한 결단이었다거나 하는 갖은 핑계를 더해, 당위성의 확보까지 스스로 이끌어낸다. 우리는 '사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사과에 목말라 있다. 

214쪽
을의 공간은 사람을 무척 작아지게 만들었다. 어떤 말썽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그에 따라 손님에게 최상급의 존대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나 역시 언젠가부터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카운터 위에서 갑의 소유가 된 햄버거 역시,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갑과 을 사이에 끼어든 '갑의 소유물'은 어떻게든 을보다는 높은 자리를 점유했다. 그래서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외치며 갑의 소유물마저 높여주고 나는 그 아래로 자진해서 내려간다. ...... 강의실의 문법과 거리의 문법에는 이처럼 차이가 있었다.
지난해 우리 사회는 '갑질' 논란으로 뜨거웠다. 땅콩 회항이나 백화점 모녀 사건이 모두 '갑질'이라는 신조어로 요약되었다. 그런데 맥도날드의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 역시 갑질의 주체였음을 알았다. 나는 갑의 공간에서 을의 입장이 되어 사유해본 바가 없었다. 그들에게 잘못된 문법을 강요한 것은 누구인지, 지금의 시대는 대체 어떤 관념에 포위되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안에 내재된 '갑'을 발견하게 해준 공간은, 강의실이 아닌 맥도날드였다.
...... 나는 아메리카노를 존대하는 노동자를 탓하는 대신, 어째서 그러한 시대의 문법이 구축되었는가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돌아보고 싶다. 저마다에 내재된 삶의 실체와 마주하도록 돕고, 누군가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을 성찰할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싶다. 갑질은 대기업, 재벌, 점주 등 어떤 특별한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흔히 인식되기 쉽지만, 우리는 여러 가면을, 저마다의 페르소나를 쓰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갑과 을의 공간을 넘나든다.

236쪽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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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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