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쪽
여자 아이들은 첫 생리를 하면 축하를 받는다. ...... 이때부터 여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먼 미래의 임신과 출산을 전제하고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된다. 담배 피우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 찬 데 앉지 마라. 이러한 풍경들은, 여성의 몸을 가진 개인에게 암묵적으로 기대되는 임신과 출산의 의무를 나타낸다.
58쪽
국가와 가정이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이 모든 위험 부담을 지며 중단해야 하지만, 여성이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은 온 세상이 나서서 막는 아이러니.
76쪽
"남자들만 있어서 칙칙하다"면서 여성의 존재를 추어올릴 때, 여성은 화사한 분위기 메이커라는 전제가 깔린다. 여성을 꽃으로 대상화해온 유구한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여성에게는 칙칙함, 즉 웃지 않음이 허용되지 않는다. ...... 누군가는 웃지 않는 여자를 불편해하고,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반긴다. 이 차이는 불필요한 미소를 강요받는 경험의 여부에서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94쪽
셰익스피어가 부릅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유태 격언 Say, "신은 도처에 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들을 만들었다." 공자왈 "아름다운 여성의 시기는 짧고,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시기는 영원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깊은 이유는 여성이 자식을 낳을 떄 고통을 겪기 때문에 아이를 절대적으로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네요. 모성과 어머니에 대한 명언이 모두 임신과 출산, 양육을 해본 적 없고 할 가능성도 없는 남자들이 남겼다는 사실은 모성 신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116쪽
'여자여자하다'는 형용사 기능을 하는 신조어이자 유행어이다(당연히 '남자남자하다'라는 말은 없다). ......
같은 맥락으로 일본에서는 '여자력'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인다. 정말이지 극동 아시아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극한직업이네요. 요리를 잘 못하거나, 크게 소리 내어 웃거나, 재채기를 소리 내어 하거나, 심지어 다리를 벌리고 앉는 등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여성적'이라고 규정하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여자력이 낮은 것이 된다. '여자답지 않은' 여자는 여자력이 낮은, 함량미달의 여성이며 점수 매기는 놈은 따로 있다. 와우. 성별 이분법은 개인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규정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얼마나 그 성별 '다운지'를 감별하고 위계를 매기고 교정하려 들며, 수치심을 주입한다.
133쪽
헤프면 어떤가? 헤프지 않다는 항변보다 중요한 건, 헤프고 말고를 결정하는 권력과 그 말에 담긴 도덕적 가치판단을 박살내는 일이다.
179쪽
잘 먹는 여성이 보기 좋다는 말은 기만이고, 또 다른 결의 억압일 뿐이다. 잘 먹어야 한다. 그러나 살 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잘 먹는' 식성은 '추한 것'이 되니까. 타고난 식사량이나 식성이 딸린다면, 잘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숭을 떨거나 까탈스러운 여자가 되니까.
208쪽
여배우들이 연기를 위해 머리를 자르거나 밀면 '진정한 배우'라는 찬사를 받는다. 이때 긴 생머리는 여배우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의 지표로 작동한다. 긴 생머리를 여자에게 중요한 아이템으로 만들어 놓고는, 이것에 조금이라도 연연하면 혹독한 반응이 기다리는 것이다.
19쪽
이 "오빠야"로 상징되는 '애교'는 여성만의 특권인 것처럼 포장되고, 여성의 무기라는 '눈물'과 나란히 배치된다. 잘 이용하면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새빨간 거짓말, 그러나 울거나 아양 부리는 것은 무기가 아니다. 상대의 배려와 호의가 있어야만 유효한 이 방법은 철저히 약자만 연마하고 구사하는 기술이다. 강아지나 어린아이가 사람이나 어른에게 요구할 때 필요한 자세와도 같다.
229쪽
커리어우먼이나 골드미스가 아니어도, 부당한 대우와 착취를 겪어서는 안 되며,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합당한 해결의 과정을 거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45쪽
딸, 누나, 여동생으로서 집안의 갈등과 화해를 조율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는 감정 노동의 압박은 여성의 선택과 감정을 집요하게 지배한다.
247쪽
세상에는 분명 나쁜 부모가 있고 아이는 가족을 선택할 수 없다. 아이는 인생의 대부분을 가족 내의 최약자로 살며, 세상은 언제나 부모의 편을 더 들어준다. 그렇다면 가족과 분리될 권리와 가족을 증오할 수 있는 자유라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254쪽
그러나 여전히 많은 딸들은 '아빠'와 '남동생'의 밥을 차려주어야 하고,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시 자원의 기회를 남자 형제에게 양보해야 하며, '엄마'의 부재 시 성인 남성보다 더 많은 의무를 짊어진다.
272쪽
친구 같은 딸, 이 말이 얼마나 많은 어린 여자들을 짓눌렀는지 모른다. ...... 문제는 친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친구 같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판타지이자, 어린아이에게 가해지는 부담인지! 친구는 동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하다. 친구 같다는 말은 친구는 아니라는 뜻이고, 양육자이자 성인인 엄마는 아동 혹은 청소년인 딸과 친구가 될 수 없다. 딸에게 기대하는 친구의 역할은 감정 쓰레기통 혹은 정서적 학대로 기울어지기 쉽다. 혹은 아이 스스로 그렇게 되고자 한다. ......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엄마와 딸은 친구가 될 수 없고, 딸은 엄마의 친구가 될 필요나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친구같이 지낼 수 있다는 기대는 '딸 됨'을 열등하고 부족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의 반영일 뿐이다. 친구같지 않으면 어떤가. 친구는 알아서 사귀는 거지, 낳아서 만드는 게 아닌데.
표현
41쪽
이 가임기 여성 지도는 우리 사회가 여성을 여전히 자궁과 출산 기계로만 인식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해준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니 황망할 수밖에. 모두가 배변을 한다는 사실과 내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배변을 해버리는 것은 다르잖아요?
64쪽
최근 몇 년간의 페미니즘 열풍으로 남녀에게 각기 다르게 가해지는 외모 기준의 모순이 폭로되고, 이를 비꼬는 방식으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남성의 외모를 대상화하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퇴적되어온 차별에 비하면 빌 게이츠 통장의 이자 18원 정도의 느낌이다.
72쪽
늘 잠이 부족하고 하루 12시간 이상을 답답한 교복에 갇혀 있는 고등학생이 웃지 않는다고, 사근사근하지 않다고 폭언을 들을 줄이야.
220쪽
개인이 저항하고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질기고 뿌리 깊은 말('오빠')이니, 우리는 계속해서 더 많이 이 말에 대해서 떠들고 비웃고 놀려야 한다.
220쪽
그렇게 강력한 비기였으면 "오빠야"라고 말하는 순간 입에서 장풍이나 독나방 정도는 나가야 하는 거 아닌지?
한마디로
69쪽
어떤 규범이 정체성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적용된다면 차별이다.
209쪽
규범과 관습 속에서 개인의 취향과 선택은 제한된다.
28쪽
오직 뛰어난 인간만이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는 증명일 뿐이다.
255쪽
시간이 흐르고 사회를 이루는 제반 요소들이 바뀐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변하지는 않는다. 어떤 착취는 오히려 그 변화에 발맞추어 더욱 교묘하고 집요해진다.
264쪽
딸을 천대하는 심리와 선호하는 심리는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자식이 아닌 딸, 사람이 아닌 여자로 대한다는 점이다. 멸시와 숭배는 한끗 차이다.
[네이버 책]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 - 이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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