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창업을 위해 독보적인 기술자 초빙, 성공 사례 독파, 검증된 창업컨설턴트의 조언,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와의 계약 등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는가? 그래서 90%가 나가떨어진다는 창업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가? 그런데 이걸 어쩌나! 철저한 준비 끝에 몇 안되는 창업 성공 대열에 들어설라치면, 발목을 잡는 건 따로 있다. 더 높은 임대료를 내겠다면 언제든 날 내쫓을 준비가 돼 있는 '임대인'이다.
7살 꼬마는 평소 엄마가 일러준 대로 건강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 시금치도 먹고 당근도 먹고, 콩밥도 마다하지 않고 먹고 있다. 날이 제법 풀린 4월의 어느 날, 유치원에 가려는 꼬마에게 엄마는 겨울 점퍼 대신 봄 가디건을 입힌다. 꼬마는 춥지 않을까 싶어 한번 쓱 물어 본다. 엄마는 완연한 봄이라며 그대로 내보낸다. 오후에 돌아온 꼬마는 감기에 된통 걸려 있다. 평소 건강을 위해 들였던 꼬마의 노력은 온데간데없다.
집을 나서기 전, 고집을 부리며 두꺼운 점퍼를 고수하지 않은 꼬마의 잘못이니 꼬마는 감기에 걸려도 싸다고 말할 텐가? 쌀쌀한지 따뜻한지, 정확히 몇 도인지 기상예보를 체크하지 않은 꼬마, 쌤통이다 싶은가? 엄마에게라도 정확한 온도를 대라며 따지듯 확인하지 않은 꼬마에게 좋은 교훈이 됐을 거라 말하고 싶은가? 날이 많이 풀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추웠지만 어쩔 수 없지, 방치할 텐가?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창업주마다 모두 다 성공할 순 없다. 그러나 노력한 창업주는 성공해야 한다. 적어도 약자라는 이유로, 강자에 밀려 나가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바늘구멍만한 틈을 열어 놓고 그 틈을 통과하지 못한 건 본인 책임이라고 말하는 건 억지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임대차보호 법안 마련이 절실하다.
천정부지 임대료
한때 인디문화의 메카였던 홍익대학교 근처는 대형 의류매장과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최근 3년 동안 임대료가 70%나 올라 못 버티고 사라진 가게들이 많기 때문이다. 제과 명장이 운영하던 30년 전통의 빵집은 대기업 계열의 커피 전문점에 자리를 내줬고, 10년 동안 영업했던 스타벅스도 지난 여름 의류 매장에 밀리는 굴욕을 겪었다.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골목 옷가게들의 임대료는 상상을 초월한다. 20㎡ 정도인 상가 임대료가 월 500만 원이 넘는다.
A 씨 홍익대학교 부근 옷가게 운영 曰 두 평 반이 좀 못된다. 임대료는 월 380이다.
몇 년 사이 인기 지역으로 떠오른 신사동 가로수길도 급변하고 있다. 오래된 가게들은 간판도 못 뜯은 채 건물을 비웠고, 여기저기 새로운 가게를 들이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터를 잡으며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그 자리를 다국적 패션기업들이 채우고 있다.
B 씨 신사동 가로수길 거리 인터뷰이 曰 디자이너 매장이 뒷골목에, 대기업 직영 및 프랜차이즈 매장이 중심가에 위치해 있어 오히려 통행 연령층이 낮아지는 등 다른 거리와의 차별성이 떨어져 아쉬움이 크다.
검증된 상권에 자리잡으려는 기업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올라 최근 문을 연 한 매장은 월 임대료 1억 원을 기록했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속수무책이다.
C 씨 공인중개사 曰 가로수길은 대기업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소형 개인 상가는 거의 없다. 그나마 현재 남아 있는 매장들도 높은 임대료를 못 버텨 나가는 추세다.
지난 2010년 말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가로수길 이면도로에 식당을 연 D 씨는 1년 동안 고전하며 자리를 잡아가던 작년 5월, 다섯 달 안에 건물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모르는 사이 건물주가 바뀌었는데, 새 건물주가 건물을 모두 사용하겠다며 나가라고 한 것. 이전 건물주로부터 장기간 영업을 보장한다는 말을 듣고, 권리금과 인테리어 비용으로 4억 원이나 투자한 D 씨는 새로운 건물주와 소송을 진행 중이다.
D 씨 가로수길 식당 운영 曰 계약 당시 건물주가 평생 임대해 줄 것처럼 얘기해서 돈을 많이 투자했다. 5년 정도 다닌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 그간 모아 둔 돈, 형에게서 빌린 돈까지 전부 다 이 가게에 들였다.
임대차보호법
임대료를 많이 받든 적게 받든 건물주의 마음이다. 하지만 건물주의 일방적인 횡포로 상대적 약자인 세입자가 입는 피해까지 정당화될 순 없다. 때문에 정부는 임대차보호법이라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해당 범위
IMF 외환위기 이후 세입자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임대차보호법의 핵심은 건물주가 연 9% 이상 임대료를 올리지 않도록 하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최장 5년 동안은 계약을 유지하도록 해 세입자의 안정적인 영업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호를 받으려면 가게의 환산보증금(보증금에 월세의 100배를 더한 금액)이 서울의 경우 3억 원, 수도권은 2억 5천만 원, 광역시는 1억 8천만 원을 넘으면 안 된다. 비싼 가게보다는 상대적으로 영세한 자영업자를 보호하자는 취지가 반영된 것인데, 이 기준에 따르면 앞서 소개한 자영업자들은 모두 보호 대상에서 벗어난다. 이미 임대료가 너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상가 임대차보호법 적용 대상>
환산보증금 = 보증금 + (월세Ⅹ100)
서울시 내 가게 환산보증금 |
< |
3억 원 |
수도권 내 가게 환산보증금 |
< |
2억5천만 원 |
광역시 내 가게 환산보증금 |
< |
1억8천만 원 |
한 부동산 업체가 서울 시내 상권 60여 곳의 임대료를 조사한 결과,
명동과 인사동에선 임대차보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었고,
신사역 주변은 4%, 강남역 8%, 신촌 주변 9%에 그쳤다.
어지간한 상권에선 억울한 상황에 처해도 법이 무용지물이란 얘기다.
안민석 FR인베스트먼트 연구원 曰 상가 임대료 수준이 주요 상권에서 급격하게 상승했기 때문에 보호 대상에 들어가는 비율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현재 면적이 지나치게 협소하거나 사각지대 또는 지하에 위치해 있는 점포들, 그리고 내부 점포들의 경우에만 상가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E 씨 카페 운영 曰 13년 전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해 카페 창업에 매달렸다. 그러다 작년 4월, 이곳에 가게를 차렸다. 매장 구석에서 설탕 포대를 베고 하루 한두 시간만 자면서 우리 카페만의 맛을 내기 위해 커피 원액을 하루에 100잔 가까이 먹어 가며 공들여 오픈한 가게다.
보증금 2억 5천만 원에 월세 600여만 원, 인테리어 비용만 1억 원 넘게 들어 은행 대출에 부모님 돈까지 끌어모아 수억 원을 투자했다. 그런데 작년 10월, 영업 6개월 만에 건물주로부터 계약을 갱신할 수 없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인력, 시간, 금액 등 투자 관련 비용에 대해 얘기했을 때 건물주가 분명, 못해도 3~4년은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문제는 당시 그 내용을 서류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는 거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서류화할 생각을 하겠나? 건물주한테 밉보이면 쫓겨나는 게 현실인데, 갑자기 월세라도 올려 버린다 하면 손해 보는 건 우리 세입자다. 어떻게 그런 걸 요구하나?
건물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전재용 씨가 대표로 있는 부동산 회사다. 이들은 이유는 밝힐 수 없다며 상가 세입자 14명의 퇴거를 요구하고 있다. 1년 만에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는 E 씨는 황당하지만 임대차보호법 대상이 아니어서 현재로선 대책이 없다.
박기대 변호사 曰 영업을 하는 임차인이 오래 있고 싶어 하는 곳들은 대개 보증금도 비싸고 월세도 비싸다. 이 경우가 주로 분쟁이 일어나는, 임자인의 보호가 필요한 경우다. 그런데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싶다.
건물주의 꼼수 ① 수수료 계약
임대차보호법을 피하기 위한 건물주들의 꼼수도 진화하고 있다. 일본식 주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F 씨와 G 씨의 얘기를 들어 봤다.
F 씨 전 H쇼핑몰 내 액세서리 매장 운영 曰 퇴직금을 투자해 작년 2월 서울 시내 한 놀이공원 지하 쇼핑몰에 가게를 열었다. G 씨와는 나란히 위치한 액세서리 매장 각 점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지금은 이 일본식 주점에서 주방과 홀 서빙을 맡고 있다. 올해 초 쇼핑몰 건물주가 나가라고 해 생활비를 벌러 함께 아르바이트에 나선 거다.
이들을 포함해 작년 2월 입점했던 가게 17곳은 모두 퇴거 통보를 받았다. 식당이었던 곳을 매장으로 바꾸느라 공사비로 8천만 원 이상씩 투자한 점주들은 1년 만에 텅 빈 매장을 보니 속이 터진다. 대기업 지하상가라는 걸 믿고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떼어놓은 물건을 제대로 팔지도 못한 G 씨는 이 일로 가정까지 깨졌다고 한다.
G 씨 전 H쇼핑몰 내 액세서리 매장 운영 曰 당장 생활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애 학원은 고사하고 교복 값도 없어서 시어머니께 손 벌리는 신세가 됐다. 너무 속상하다.
이들은 장사를 1년도 못하고 쫓겨나게 됐지만, 임대차보호법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매달 매출의 15%를 건물주에게 내도록 수수료 계약을 맺어,
월세처럼 돈을 내긴 하지만 법적 '임대차 계약'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영중 변호사 曰 수수료 계약은 언제든지 나가라고 할 수 있는 계약이다. 점주들 입장에선 상당히 불리한 계약일 수밖에 없다.
건물주의 꼼수 ② 1만 원의 함정
이들과 함께 퇴거 통보를 받은 미용실 업주는 작년 초 쇼핑몰 측이 제안한 대로 보증금 5천만 원에 월세 251만 원에 계약을 맺었다. 250만 원도 아니고 251만 원은 또 뭘까? 이제 와서 환산보증금을 계산해 보니 3억 100만 원. 단 100만 원 차이로 임대차보호법 적용이 안 된다.
I 씨 H쇼핑몰 내 미용실 운영 曰 1년이 지나서 나가라고 해 계약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봤다. 252만 원이든 3만 원이든 당시 서로 믿고 잘해 보자는 마음으로 계약하는 와중에, 본인들도 별다른 얘기가 없는데 딱히 무슨 의심을 품고 자시고 하겠나.
법이 있어도 사실상 보호를 못 받거나 이를 피하기 위한 편법만 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상가 건물 임대차보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늘리는 게 시급하다.
100명의 창업자 중 85명이 폐업하고, 스스로를 소작농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자영업자들.
이들을 보호하겠다는 법이 오히려 합법적으로 내쫓는 도구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D 씨 가로수길 식당 운영 曰 100년 된 건물, 상회? 우리나라에는 그런 가게가 있을 수가 없다. 쉽지 않다. 100년은 무슨 100년인가!
※ 임대료가 기가막혀 | 2013-04-14 | 시사매거진2580 Link
막돼먹은 강자씨 MONZ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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