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쪽
실험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정해진 역할이 좀 느슨해지면 개인의 성격과 취향이 드러나는데, 그걸 서로 용인하거나 혹은 함께하거나 협조한다.
21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때의 진정한 의미는 남들과의 관계에서 나의 이익을 취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의 이익이 나의 이익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22쪽
가족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기능하게 만드는 소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이런 사회가 주지 못하는 원시적 부족민으로서의 소속감을 제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 그렇게 어려운 실험은 아니었다. 차이는 간단하다. 사회의 경쟁과 평가 기준을 가족 안에 들이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35쪽
"아빠가 왜 화를 내는지 네가 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 아빠는 그냥 화가 나는 거야. 그렇다고 네 잘못도 아니야. 네가 잘못했는지 아닌지는 아빠가 화를 내든 안 내든 상관없이 네 스스로 판단하는 거니까."
50쪽
식구들을 안 깨우려고 조심하는 기특한 점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떼쓰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의 착한 행동과 나쁜 행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닌 이상 그 사람 자체인 것으로, 그리고 각자 자기가 하고 싶다고 스스로 정한 일을 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에 대한 좋고 나쁨을 평가하지 않는다.
60쪽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좋아하고, 결혼하고, 그를 알아가면서 미워하는 과정을 거치며 알게 된 나의 취향, 즉 키 크고 뚱뚱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저 막연히 내 이상형을 그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와 내가 함께 겪은 많은 일들 가운데에서 내가 그에게서 찾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 남들이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해도, 뚱뚱한 게 뭐가 좋으냐고 해도, 내가 바로 그 때문에 가슴이 뛰었다는 '나' 자신을 굳게 믿는 것 말이다.
아이가 아빠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자상하고 멋진 아빠인 것보다 똑같은 밥을 두 번 먹지 않게 해주는 사람인 것도 비슷한 이유로 소중하다. 아빠가 아이의 삶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경험을 함께했는지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남들과 비교해서 혹은 남에게도 있는 아빠라서가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공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65쪽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란, 정답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들이 그 맥락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는 깨달음이다. ......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역사의 쓸모에 관해 설명하면서 서양의 잔디밭을 예로 든다. ......역사적으로 귀족들은 많은 하인을 거느려야 유지할 수 있는 푸른 잔디의 크기로 권력과 지위를 자랑했다. 그러다 귀족이 없어진 지금은 타당한 이유가 사라졌는데도 잔디밭의 관리가 관습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안다는 것은, 잔디밭을 없애는 용기의 출발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역사의 효용이다.
82쪽
"날 우러러보거나, 다른 누구도 불쌍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네. 검소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살 구부러진 우산을 내 거라고 챙기는 사람일 뿐이지. 새 우산은 비가 오는 이 시간, 이 장소에 딱 자네 것일세. 난 자네를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선행하려는 게 아니야."
...... 아이에게 옳고 그름을 정해서 가르치거나,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언제나 복잡한 일이다. ...... 그럴 때 20년 전의 신부님을 생각하곤 한다. 내가 옳은 것을 내가 행하면서도 그것을 규칙으로 삼지 않고, 나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기 위해 유연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해.
89쪽
우리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고민 과정을 통해 부모 역시도 더 나다운 인간이 되는 것, 그게 어쩌면 아이가 우리에게 주는 큰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94쪽
모든 것은 더 높은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환경과 학습으로 모양이 잡혀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과 방식을 찾으면, 이것이 장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95쪽
물론 처음부터 둘째가 대답을 잘한 것은 아니다. "몰라, 그런 걸 왜 물어봐?"라는 대답만 했다. 그럴 때는 나 역시 바로 물러났다.
"알았어. 엄마가 너한테 질문하는 건 엄마가 궁금해서가 아니야. 네가 답하기 어려운 걸 생각해봐야 똑똑해지지. 그걸 도와주려는 것뿐이니까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113쪽
인간은 집단 내에서의 서열을 정하고, 비교하고, 경쟁하는 특성을 가진 동물이다. 그런데 집단 구성원의 다양성이 떨어지면, 즉 하나의 기준으로만 경쟁하게 되면 그 경쟁은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다. ......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수백 억, 수천 억 자산가라면 돈에 대한 고민은 하나도 안 할 것 같은데, 부자끼리 모이면 이들의 부유함에도 서열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놀랍게도 아직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고 진심으로 아쉬워한다. 이런 경쟁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나는 내 아이가 한 가지 경쟁 원칙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란다. 공부의 필요와 그 나름의 즐거움을 스스로 느끼는 것과, 균일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에서 차별과 더 높은 서열을 위해 비교하고 열등감과 불안을 느끼며 공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경쟁을 통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은 자연에서처럼 다양성이 전제될 때 가능한 일이다. 각자 자신으로서 가장 빛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경쟁 말이다.
115쪽
환경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 역시 환경을 변화시킨다. 이런 관계를 가족이 함께 경험하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은 환경의 시작이다.
126쪽
내 목적은 경험을 통해 아이가 완벽하게 하는 것을 배우는 게 아니다. 실수를 거듭하면서 삶이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직접 느끼기를 바란다. ...... 이런 실수 교육이야말로 조기교육이 꼭 필요한 분야이다. 아이에게 마음껏 실수하라고 말해주고 책임져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다.
138쪽
아이가 화낸 것은 엄마를 인터넷 사용을 금지하는 '권력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엄마를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위한 '협력자'로 인식시키는 것이 이 갈등 해결의 첫 단계다.
144쪽
어려서부터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자신이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의심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146쪽
그럼 도대체 아이에게 어떤 식으로 면역이 되는 실패와 고난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를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설명하는 '파르헤지아(Parrhesia)'라는 개념에서 찾고 싶다. ...... 푸코가 주목했던 파르헤지아의 중요성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데 있다. 진실은 논리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 "네가 원하는 걸 얘기하면 들어줄게."라는 말을 무서워 하는 것이다. 그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진심이어야 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고, 그리고 불이익을 스스로 감수해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 앞으로 아이가 커서도, 사회가 정해준 옳고 그름과는 다를 수 있는 자신만의 진실된 감정을 똑바로 이해하고 관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조건 사회의 기준에 불만을 표하거나 반항하는 대신,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와 불이익을 냉정하게 계산하는 것까지 말이다.
152쪽
'상황 학습(Situated Learning)' 이론에 따르면 학습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동체 안의 일원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 하나의 문화가 건강하고 강하게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문화에 반항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교육의 목적이어야 한다.
168쪽
돈을 쓴다는 것은 나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적나라한 행위다.
171쪽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대비와 충돌 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갈망하면서 자신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179쪽
우리가 싸우는 목표는 상대를 설득해서 나와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욱 나다워지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상대에게 내 의견을 주장하는 경험만큼 강렬하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기회도 드물다. 그래서 싸움의 상대는 나를 비난하는 적이 아니라, 좋은 파트너이다.
186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생 이야기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그가 작가가 되기 위해 술집을 차린 결정이다. ...... 그는 술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재즈를 틀고 자기가 좋아하는 술을 다루면서, 적어도 먹고살 걱정은 안 할 만큼의 돈을 벌 계획을 세웠다. ...... 하루키처럼 성공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계속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87쪽
남들이 필요하다고 계산해주는 돈의 액수가 아닌, 지금 내가 삶을 즐기기 위한 돈의 액수를 찾아내는 것은 한평생 이어지는 재미있는 탐구임을 깨달았다.
200쪽
'네가 잘하는 다른 걸 찾으면, 그건 공부를 못하는 정도만큼 더 많이 잘할 거야.'
205쪽
그러기 위해서 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성취하거나 배우거나 이루지 않아도, 그저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도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선택했다. ...... 아이의 존재 자체가 가족에게 쓸모가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내가 공부를 잘하거나 무엇을 이뤄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거운 일을 하면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218쪽
고난.불행, 자기 합리화라는 두 가지 특성이 마음껏 발휘되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 더 심하게 말하자면, 남 탓과 자기 합리화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가족이 서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인간의 본성과 가족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에 어떤 가정이나 예외가 없다. 식욕이나 성욕이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가족에 대해 이런저런 염려나 불만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225쪽
가족을 동참시키고 싶다면 우선 타인은 내버려두고 나만 잘하면 된다. 그것을 보고 옆에서 따라 할 수도 있고,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된다.
227쪽
그렇게 자기 결정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낸다. 인생이 자기 것이면 자꾸 더 가꾸고 싶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본주의의 완승을 보면서 알게 됐다.
258쪽
할머니, 엄마, 아빠가 살아온 삶은 내 인생의 전제 조건이다. 그들의 삶이 펼쳐지는 것을 보는 것은 내 삶을 이해하고, 앞으로 내 삶이 저물어가는 것을 조망하게 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즉각적이다. ...... 죽어도, 만나지 않아도, 가족은 나를 구성한 역사이니 남보다 더욱 냉정한 거리를 두고 보아도 된다.
276쪽
어쩌면 가족은 공유하는 특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특별함을 만들기 위해 다름을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형제자매들끼리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내기 위해 형제와 다른 것을 선택하는 심리적 기제에 관해 이야기한다. ...... 같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또 그런 같은 성향으로 인해 그 상처를 넘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283쪽
가이드는 불릿 센터가 '살아 있는 빌딩'이라고 설명했다. 자급하고 자립한다고 해서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기술과 철학, 주변 자연환경과 인간이 만든 모든 조건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덕분에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 책] 오히려 최첨단 가족 - 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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