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쪽
즉 국가 중심의 평화는 군사주의적 질서를 강화시켜 나가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또 다른 형태의 여성 억압 논리로서 한 사회나 국제사회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24쪽
32년간의 군사정권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위계적 군대 문화가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 왔음을 많은 이들이 공감하였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아직도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다른 점은 한국 사회에서는 이 영향력을 주로 문화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 훅Glaenn D. Hook은 그것을 군사주의라고 규정하여 내재된 신념이나 가치관의 문제로까지 보고 있다는 것이다.
26쪽
이런 검토를 통해 군사주의의 개념을 정리해 본다면 복합적인 신념 체계로서 군사주의는 군대의 존재와 힘의 부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또한 효율적인 조직 운영과 관리를 위하려 위계와 통제와 훈련이 핵심이라고 믿고, 효율적인 병사 역할을 위해 필요한 남성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민족과 우방이나 대단위 집단의 이름하에 집단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가치 등이 서로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들은 현대사회에서 민족주의, 국가주의, 가부장제의 신념 체계에 의지하고 이의 특성을 지지하거나 강화한다.
...... 군사화는 이념 또는 가치 체계로서의 군사주의의 일상화 사회화를 일컫는다.
37쪽
이런 힘의 논리에 기초하여 강한 국가만이 평화를 유지할 것이라는 논리는 세 가지 특수성을 낳는다. 첫째는 강한 국가주의 사회의 탄생이고, 둘째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개의 거의 연속적 전쟁을 거친 나라임에도 평화운동이 부재하였고, 셋째는 전쟁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가졌음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깊숙이 군사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53쪽
또한 이런 국가적 활동의 참여는 기존 남녀 간의 성별 역할 분담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기존의 역할에 새로운 역할 부담이 더해져 노동 부담만 커지기도 했다. 이런 국가 단위의 평화의 지향은 결국 여성을 다양하게 동원하지만 동시에 주변화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75쪽
술에 취해서 한 말 때문에 보안법 위반자로 처벌되는 일들이 생기면서 국가보안법의 애칭(?)으로 쓰였던 막걸리 반공법은 용공 좌경에 대한 통제가 어느 수준으로까지 이루어졌는가를 보여 준다. 용공 좌경으로 몰기 위한 정권의 확대 조작도 심했지만 실소를 낳게 하는 막걸리 반공법은 술에 취한 언동을 문제라고 생각한 주민 신고가 있어서 가능했다.
76쪽
문용린은 공산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도 반공에 저촉되는 행위로 여겨져 왔던 교육의 문제를 지적했다.
78쪽
이와 같이 한국의 반공주의는 이성적 이념적 논쟁 속에서 커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산당은 안 된다는 내용 외의 다른 사유가 없었던 반공주의가 무소불위의 힘으로 사용되고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반공주의가 국가주의의 쌍생아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국가주의의 강화와 같이 커 나간다. 한국 반공주의의 경험적 근거는 한국전쟁이다. ......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의 반공주의가 1960~1970년대보다 더 강했다는 증거는 적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띠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 득표의 30%의 지지를 받았던 점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진보 정치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던 상황에 비춰 보면 상징적이다. 반공주의는 박정희 시대에 적극적으로 사용되면서 근대화의 윤활유, 국민 융합제, 또는 원천적 자원으로서 본격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85쪽
오히려 반공주의적 실천 속에서 일상화되고 상식화되었던 강한 애국주의를 전제로 하는 국가주의, 적대성을 중심으로 한 군사주의, 전체를 하나의 생존권 단위로 이해하는 국가적 집단주의, 물리적 힘의 우위를 통한 해결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군사화된 평화 논리 등이 반공주의의 영향력 속에서 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109쪽
결국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태도나 아니면 뒤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태도 모두 떳떳하거나 자연스럽게 인정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천에서 무언가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자의식은 활동가로서의 온전함에 상처를 주는 일로서 여성 활동가들이 주로 경험하는 문제였다.
149쪽
그녀의 이야기는 여성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또다시 주변화된 지위에 속하고 싶지 않은 소수 멤버의 본능적 생존 전략이었음을 보여 준다.
149쪽
무엇보다도 군사정권 종식, 통일, 경제적 불평등 문제 등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며, 여성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인식이 여성 문제의 제기나 여성주의적 정체성의 성장을 막았다. 이런 정서 속에서 성폭력 문제까지도 사소하고 취급된다. ...... 한결같이 문제로 진지하게 다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조직에 누가 되고 운동의 대의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135쪽
김영희가 지적한 대로 치마만이 여성의 활동가적 정체성의 경계를 구분하는 유일한 주제는 아니었다. 죠다쉬 청바지라든가 나이키 운동화 같은 외국 상표의 상품들은 운동권에서 허락되지 않는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유행이 되어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 브랜드들은 치마와는 달리 학생 운동가들의 계급적 민족적 경향성을 더 드러냈고, 남성 활동가들에게도 해당됨으로써 덜 성별화되었다.
121쪽
이렇게 사회집단 간의 이익 갈등에 대한 경험이 적고, 민족, 국가라는 절대적인 대의에 대한 의식과 대학생만 되면 얻어지는 지식인적 지위는 자신을 쉽게 선진적 의식을 가진 자들로 또한 자신을 헌신하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주체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한다.
163쪽
10월 유신의 핵심 모토인 한국적 민주주의란 물질적 차원에서는 산업화를 추구하여도 정신적 차원에서는 한국적 가치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안보적 차원에서 혼란을 낳는 민주주의적 질서를 중단하고 기존의 전통적 가치를 복원·보전하려 하였다. 이 한국적 가치의 복원은 성별화되어서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에 남성적 이상형으로 이순신이 여성적 이상형으로 신사임당이 선택되어 대중적으로 부각되었다.
171쪽
이런 현상은 국가주의적 경험이 강한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국가에 의한 여성 동원이 여성의 국가 의식을 강화하고 일정한 역할 확대를 꾀하는 것과 동시에 여성에게 가정을 더욱 중심적 공간으로 삼을 것을 정책이나 선전 선동을 통해서 강조한다.
177쪽
집단으로 사적인 문제를 들고 오는 것, 잡다한 고민이 많은 것 등은 모두 여성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남성적인 것으로서 긍정과 부정의 강한 뉘앙스를 붙이면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어린 시절부터 일을 많이 하면서 커 일을 겁내지 않고, 남자 형제에게 발 닦을 물을 가져다줄 정도로 젠더적 위계에 수용적이었던 김상인은 집단에 헌신한다는 명분 속에서 모성적 역할을 열심히 수행했다.
185쪽
잡다한 고민을 하지 않고 집안 문제를 집단에 가져오지 않는 자신과 다른 여성 활동가의 처해 있는 조건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런 여성을 집단에 대한 헌신성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단정하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여성의 시각에서 사물을 이해하려는 개념이나 언어가 거의 전무했던 그녀가 속해 있던 학생운동 상황을 보여 준다. 또한 이런 반응의 기저에는 그녀의 전통적인 젠더 의식도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180쪽
'컵 깨기 행사 취지문'에서
이러한 노동이 언제나 여성에게 집중되어 업무의 능률을 훼손할 만큼 심각한 감정 노동을 야기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차별의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다. 더러워진 개수대를 보면서 설거지를 할까 말까. 안 하면 일단 더럽고 아침의 갈증을 덜어 줄 차를 못 마시며, 안 하고 놓아둬서 결국 다른 여성이 하게 되는 걸 볼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가정에 가정, 갈등에 갈등을 더하는 그 감정 노동, 손님이 왔을 때 ‘차를 줄까 말까? 누가 나서지 않을까? 안 나서면 어떻게 하지? 그냥 해 버려, 말어? 냉정해져, 말어? 모르겠다. 하면서도 '이런 게 내 일로 굳어지면 어떻게 하지? 에이 그냥!' 식으로 반복되는 첨예한 갈등, 질식할 것 같은 감정 노동, 컵이 필요할 때, 필요로 되어질 때 자신이 나설까 말까를 수없이 고민하는 여성들의 감정 노동을 기반으로 남성들이 정치를 얘기하고 정당을 논하며, 논리와 이성, 어설픈 관점에 입각한 쌈박한 논쟁을 하고 있다.
196쪽
문제는 이런 국가주의적 근대화 프로젝트를 실행시킨 경우 장기 집권이나 반인권적 폭압 정치 등 두드러지는 반민주주의적 질서에 대한 비판 외에 개인적 시민적 자유나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적이고 경험적인 이해가 자리 잡기 힘들다는 것이다. ......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 부여와 분열에 대한 극도의 초조함과 개인주의에 대한 혐오 속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개인의 자기 이해에 대한 표현과 의사 결정에 대한 참여가 가능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동시에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체험적 민주주의, 일상적 관계에서의 평등함을 키워 나가는 민주주의, 또는 소수자의 삶과 고민이 반영되는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근본적으로 부족했다.
211쪽
현재 징병제를 유지하는 나라 76개국을 모두 비교하여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징병제의 유지 여부가 다양한 국가에서 뜨거운 감자 노릇을 하곤 하는 현실과 비교해 보면 한국의 논란 없음은 예외적이다.
213쪽
역사학자 한홍구는 반군사독재 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이 그렇게 활발했던 1980년대에 어떻게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반문한다.
217쪽
이와 같이 징병제는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필요성에 대한 상상이 필요 없는 동의 속에서 존재해 왔다.
229쪽
그러나 군가산점 문제는 모든 것이 헌법 소원을 한 여성들에게 표적이 맞추어졌고 장애인이 같이 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이다. ...... 김정열은 유일하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공무원 임용 시험임에도 이렇게 장애인 비율이 낮았던 이유를 군가산점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 장애인들은 논란의 진행 과정 속에서 소외되고 성 대결화되면서 쏟아져 나왔던 논리에 또다시 상처 받는 이중의 소외 과정을 겪었다. ...... 김정열은 "...... '가산점 받고 싶으면 군대 가라'는 이들의 반응은 장애우들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40쪽
최근의 여론조사도 이런 분석을 지지하는데 여성은 56%가 여성 징병에 찬성하는 데 반하여 남성은 24.9%만이 찬성하고 있다. ...... 이동흔은 여성 군인의 수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남성 군인들의 반응을 설명한다.
남성 군인들은 '국가 안보'를 남성주의 담론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군대에서 여성을 보자 당황했다. "남성들은 자기와 함께 전방의 참호에 있는 여성이 아닌, 저 후방의 어딘가에 있을 여성들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같은 참호에 있는 여성은 남성의 자아를 짓밟는다." 그러므로 남성 군인들은 군대의 남성다움을 보호하기 위해 여군을 거부하는 것이다.
269쪽
남성 간의 강간을 연구한 스카스도 ...... "교도소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군대의 남성 간 강간은 남성의 우월함이라는 광범위한 영역 안에서 내부 권력 갈등에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일어난다."라고 한다.
...... 교도소의 수인들은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근본적인 결정들, 무엇을 먹고, 입고, ...... 문제를 스스로 아무것도 정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이런 심리적인 무력감은 힘이 있는 인간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강하고 싶은 강한 본능적인 욕구를 유발한다. ...... 강간 등의 성폭력은 다른 사람의 몸을 지배하고, 당하는 이를 성적 대상화(여성화)함으로써 남성적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281쪽
군대에서 계급적 우열 관계에 의해서 빚어지는 성폭력에 대한 피해, 가해의 경험이 일반 사회에서 약자를 주로 구성하는 여성에게 어떤 형태로 전환될 것인지에 대해 우려할 수밖에 없다.
[네이버 책] 대한민국은 군대다 - 권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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