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쪽
우리는 앞에서 세상을 사심 없이 관조할 수 있는 성찰 능력을 일상의 모욕, 배제, 차별에 대항하는 노련함의 전제이자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역설적으로 이 능력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을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삶을 실존으로 받아들이는 일도 방해한다.
46쪽
자아를 지키고 자신을 연출하는 데 골몰하는 고도의 노련함은 결국 삶 자체를 퍼포먼스로 만든다. 노련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연극적 수행으로 채우고, 타인의 행위도 연극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24시간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위도 진심으로 믿지 못한다.
48쪽
SNS가 발달한 시대에는 평범한 개인의 퍼포먼스조차 무한한 관객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 대다수는 매사에 삶을 연기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수많은 설정 사진, 점점 더 자극적인 1인 방송을 연출하는 유튜버들의 행위에서 그 충동의 그림자를 본다.
66쪽
사람들이 품격을 위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와 존엄을 위해 만들어내는 퍼포먼스에는 큰 차이가 있다.
67쪽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71쪽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107쪽
이처럼 '농Deat', 즉 생물학적으로 청력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지만 수화언어를 통해 언어생활을 하는 상태는 그들에게 고유한 성격과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며, 이를 기초로 일종의 문화가 형성된다. '농문화Deaf culture'라는 말은 장애인의 삶을 미화하는 공익 캠페인의 표어가 아니라 수어에 기초해 형성, 변화되는 실재다.
만약 우리에게 100미터 넘게 떨어진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고, 공기가 없는 우주 공간이나 물 속에서도 복잡한 의사소통을 쉽게 할 수 있는 언어 체계가 있다면 우리 사회의 모습은 지금과 매우 다를 것이다. 철학을 전공한 스쿠비다이버들이 바다 속에서 사회철학 심포지엄을 여는 일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 수어를 하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컵홀더가 달린 셔츠도 등장할 것이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흥미롭고 풍성한 문화적 다양성의 예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119쪽
다리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굳이 목발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건강에 더 좋으리라는 기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비장애'의 상태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 반짝이며 성장해야 할 어린 시절을 생명을 구하거나 통증을 관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고통스럽고 비싼 수술과 치료, 재활을 감내하며 보낸 것이다. ...... 장애나 질병 또는 그 무엇이든 우리 몸에 완전히 부착되어 내 존재의 일부가 된 조건을 '어설픈 정상인'이 되기 위해 감추고 바꾸려는 노력을 어디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124쪽
서너 명이 모여 휠체어를 밀고 바람같이 차도를 질주했다. ...... 우리는 도로를 달리며 생각했다 '너도 이렇게 막 도로 위에서 위험천만하게 달리고 싶냐?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보지 그래?'
이 감정은 물론 허세로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저항적인 자기 인식과 세상에 대한 고유의 해석을 토대로, 자신을 비정상이나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 고유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다. 자아에 스타일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는 다른 코다를 만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통역사 역할을 해왔던 기억, 수어와 구어 모두를 유창하게 활용하는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나눈다. ...... 스스로 '나는 코다입니다'라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순간 스타일이 출현한다.
이처럼 과거에는 결여나 결핍, 부족함, 기껏해야 '괴물'로 여겨졌던 존재들이 자신의 그러한 속성을 적극적인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흐름은 최근 수십 년간 급격히 확신되었다.
127쪽
우리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우리를 보호하는 국가와 공동체, 우리를 구원하려는 종교 지도자들과 성서의 가르침은 결코 "너의 욕망대로 살아라. 만약 남들이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라고 말하라" 하고 가르치지 못한다. 우리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때에만 정상성의 결여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인 자신을 인식하는 정신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다.
113쪽
그럼에도 어떤 장애인들은, 특히 자신의 장애를 단지 극복해야 하고 없애야 할 요소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진지하게 숙고하고자 하는 이들은 장애에 대한 전적인 부정의 언어와 태도를 만날 때 매우 심란해진다. 이런 감정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우생학Eugenics으로 불린 인종과 장애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운동을 떠올려보라.
127쪽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질병과 천재성, 인간적 고유성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렇기에 유전 질환과 질병을 완전히 없앤 사회가 더 풍요롭고 흥미로운 세계일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128쪽
만성적인 질병, 늘 약을 먹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고, 때로는 빨리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질병이나 우발적인 사고로 갖게 된 '장애'라는 몸 상태는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야기narrative가 된다. 내 몸이 가진 이 속성, 흔적, 경험으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정체성이란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장애를 정체성으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택이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과 역사를 내 자아의 중대한 부분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처럼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단념한 채 살기 위해 펴는 전략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144쪽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입장)'를 수용한 것이다.
146쪽
따라서 우리는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해, 혹은 그것이 지닌 어떤 객관적 가치 때문에 장애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으로서 그와 같은 속성들을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147쪽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반 고흐의 그림을 최고 성능의 컬러복사기를 이용해 복제한다면, 그 그림은 고흐의 원작과 다를까? ...... 즉 우리가 수평적 정체성으로서 옹호하고자 하는 장애나 질병, 너무 크거나 작은 키, 인종, 특정한 정신질환, 성적 지향 등은 한 사람이 어떤 경험과 도전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151쪽
그러므로 정체성을 수용한다는 말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지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152쪽
자신이 억제하기 어려운 뇌의 충동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자신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다. 뒤의 것은 자신에 대한 자율적(실천적) 결단이다. 따라서 '사이코패스 정체성' 또는 '소아성애 정체성', 나아가 '알코올 중독자로서의 정체성'을 운운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해명하는 일은 자기 정체성을 수용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시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153쪽
정체성의 수용에 성공한다면, 그는 장애와 질병으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특질을 가지고 살아갈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이란 걷지 못하는데도 억지로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걸을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이 부자유하고, 가치 없고,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다. 자기 몸과 정신이 부여한 자연적 경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은 버리지 않는다.
키가 아주 작거나 얼굴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 추하고, 존엄하지 않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부담한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네이버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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