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 장강명


17쪽
여자들더러 아이 많이 낳으라는 사람들은 출근시간에 지하철 2호선 한번 타 봐야 해. 신도림에서 사당까지 몇 번 다녀 보면 그놈의 저출산 이야기가 아주 쏙 들어갈 텐데. 그런데 그런 소리 하는 인간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 않겠지.​

17쪽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 ...... 난 내가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뭐 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 일이 재미있다는 말이 뭔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일? 그게 뭔 소리야.

25쪽
"지금 내가 있는! 이 땅이 너무 좋아! 이민 따위 생각! 한 적도 없었고요!"
...... 중년 남자들이 <빙고>를 부르는 이유는 다들 너무 힘들어서 아닐까. 다들 이 땅이 너무 싫어서 몰래 이민을 고민하는 거지. 그걸 억지로 부정하고 자기 자신한테 최면을 걸고 싶은 거야.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라고,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라고. 그런데 이민을 가면 왜 안 되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 몇 년 뒤에 호주에서 <빙고>를 부른 가수 소식을 들었어. ......터틀맨이 지병이던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 심근경색 치료비가 많이 들어 궁핍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소속사와 돈 문제로 갈등을 벌이다 새로 회사를 차렸는데 잘 안 돼서 빚을 지고 매니저 일까지 해야 했다는 이야기.

103쪽
내가 어렸을 때 아현시장은 굉장히 번창한 곳이었어. 주말이면 장 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거기서 장사 몇 년 하면 금방 부자 된다고 했어. 시장에 갈 때마다 엄마가 나랑 예나를 데려가 짐을 들게 하면서 시장 입구에서 도넛이나 고로케를 사 주셨어. 그래서 그 가게 할머니를 잘 알았지. 그런데 그 도넛 파는 할머니가 부자가 된 것 같지는 않아. 아현시장은 이제 썰렁해. 요새 누가 재래시장에 가?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160쪽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 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 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169쪽
그런 일을 겪은 뒤 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별로 그렇진 않았어. 선생님한테 혼난다고 부모님이 고마워지디? 

171쪽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고. "끝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172쪽
회계 배울 때, 경제학 원론도 같이 배우거든, 거기 비교우위론이라고 나와. 혹시 알아? 농사짓는 나라는 농사만 전문적으로 짓고, 고급 서비스 창출하는 나라는 고급 서비스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내용인데. 수학적으로 그게 증명이 돼. 그런데 그 이론대로면 농사짓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농사만 지어야 하는 건가? 사람은 자기가 일하고 싶은 나라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면서 물건 수출입만 자유롭게 허용하자는 주장 좀 이상하지 않아?

184쪽
매달 100만 원씩 들어오는 수입이랑 자산 7억 원을 같은 거라고 생각해야 한대. ......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작품 해설> 허희(문화평론가)
197쪽
진짜 까다로운 주체는 누구인가. 계나 스스로 자신을 까다롭다고 수긍하게 만든, 내면화된 '사육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소나 돼지인 양, 축사에 가두어져 주인이 주는 대로만 먹고 살다가, 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길들임의 체제가 한국에서 스스럼없이 작동하고 있다. 거기에서 창출된 이득은 주인에게만 온전히 돌아간다. 그러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가축인가. 외양만 보면 구별되지 않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편이 주인이고, 사육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편이 가축이다. 배분되는 사료에 만족하라고,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가 바로 주인이자 거꾸러뜨릴 대상이다.

 

 

[네이버 책] 한국이 싫어서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꿈꾸지 못하는 절망적 상황에 놓인 한 여자의 대처법!문학성과 다양성, 참신성을 기치로 한국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의 작품을 엄선한 「오늘의 젊은 작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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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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