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쪽
이 두 단어를 놓고 많은 이야기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일단 나는 여기서 '위'의 역사가 만들어낸 주체로서의 느낌이 강할 때는 '국민',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주체적 느낌이 들면 '시민'이라고 썼습니다. 외세의 침입으로 근대화가 본격화된 한국의 경우, 근대의 역사는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적 주체와 동원된 애국적 국민을 양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때 국민은 나라를 무조건 사랑하면서 외세를 미워합니다. 애증의 감정이 국민의 감정이지요. 그러나 시민은 개인에서 시작하고 공감의 감정으로 확산합니다. '국민성'이 단일성과 통합을 강조하는 반면 '시민성'은 다양성과 연대를 중시하는 근거이지요. 이 책에서 나는 그간 오로지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통합을 강조하며 달려온 '국민'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연대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1쪽
소설가 박민규는 이런 걱정 근심을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라오라>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불쑥, 어서 올 생각 아예 말아라, 어서어서 서두르다 넘어지지 말고 그러니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라. 어떠한 부담과 희망... 원망 없이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우선은 그저 서로의 '실익'을 얘기하자. 하나의 겨레였느니 그딴 소리 접어두고 이익과 생존을 목표로 한 '각자'와 '각자'로 서로를 존중하자. 한 걸음 한 걸음 끝까지 너는 너를 위하고 끝까지 나는 나를 위하자.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나를 위한 일이 너를 위한 일이었음을, 그래서 너가 나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각성하자."(<경향신문>, 2018.4.27.)
49쪽
각자도생이 몸에 밴 사람은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스튜디오를 갖게 된 주인은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53쪽
널널한 시간 속에서 의논하면서 사는 삶 말이다. ...... '사유하고 발명할 여유가 있는 시민' 말이다.
67쪽
인류의 진화는 '불의 발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불을 둘러싸고 모여 의논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라는 나의 주장에 모두들 동의를 하더군.
86쪽
후기 근대의 숙의민주주의는 재난 현장에서 꽃을 피운다. 그리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숙의할 시간을 가진 국민이 얼마나 될까? 생업으로 바쁘고 가짜 뉴스까지 판을 치는 정보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기에 바쁘다. 여론조사가 아니라 공론조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공론조사를 설계하고 진행한 공론화위원회의 경험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론장에서 키워진 감각과 기억은 결과와 상관없이 꾸준히 자라나 때가 오면 꽃을 피운다.
90쪽
해방적 파국이란 극단적 상황에서 도리어 좋은 길을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91쪽
한국 근대화 초기의 동력은 가족 중 한 명을 성공시키는 데 공모한 다음에 그 열매를 나눠 먹는 가족주의적 신분이동 문화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묘한 집단주의가 우리 일상 문화가 됐다. 그렇게 공모하고 결탁해서 끌어주고, 권력자의 비리도 밑에서 받쳐주는 것이 일상화됐기 때문에 '시민적 공공성'이 설 자리가 없었다.
98쪽
카페오공의 셰어하우스 '우동사', 용산의 '빈집'과 '빈고', 제주도의 '재주도좋아' 등을 예로 들었다. 특히 월 70만 원으로 살기를 실험 중인 '우동사'에 대해 조한 교수는 "기본소득 제도를 미리 실천해보고 있는 셈"이라고 전했다. "월 70만 원만 있으면 굶어죽지 않는다고 하면 두려울 게 없어집니다. 재벌가 자녀 중에서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싶은데 자립할 방법을 모르는 청년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계속 살면 재벌집도 지옥이죠. 그렇지만 어디든 가서 살면 살아지고,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숨을 쉴 수 있잖아요. 그런 모델이 많아지면 국가도, 자본도 두렵지 않은 막강한 힘을 시민이 갖게 되는 겁니다."
99쪽
"어차피 선진국 개념도 의미가 없어지는데 언제까지나 선진국 뒤만 쫓을 게 아니라, '선망국先亡國' 개념으로 바꿔서 생각합시다. 한국은 이미 굉장히 앞서가는 선망국이죠. 이 선망국에서 청년 문제, 세대 문제와 같은 사회 문제를 푸는 해법을 나름대로 찾는다면 인류에 희망을 제시하는 게 아닐까요?"
104쪽
답답한 건 그런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시간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론을 말해봐" 하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그 단위는 아무 가닥도 못 잡은 채로 목소리 큰 사람에게 끌려다니다가 허탈하게 끝나고 맙니다. 일단 뭐가 문제인지 저 사람 얘기도 듣고 이 사람 얘기도 듣고, 내 얘기도 하고, 그러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모였으면 빨리 어떤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오히려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120쪽
북유럽 국민들이 1, 2차 대전의 위기를 겪으며 소득세를 높이는 데 전격 합의하여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냈듯 심각한 인구위기를 겪는 우리는 지금 증세를 통한 체제 변화를 꾀할 '골든 타임을 맞은 것이다.
130쪽
저출산은 '사회'에 대한 감각의 실종에서 오는 현상이며 매매와 꼼수로 해결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135쪽
위협받는 환경을 감지하고 출산을 하지 않는 통찰력 있는 청년들에게 푼돈 주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고 아이를 낳겠는가? 지금은 실은 출산율이 낮아야 하는 시점일지도 모른다.
184쪽
사회가 국민 개개인의 생존을 기본적으로 보장하는 복지체제가 마련된 경우, 국민들은 쉽게 적대적이 되지 않는다. 반면 그런 기반이 없고 쏟아지는 난민을 주체하기 어려운 동유럽 국가에서는 국경을 넘어가는 난민들 대상으로 적대지수를 높여가고 있다.
208쪽
최근 스위스 정부는 원전 사고 위험지대를 반경 20km에서 50km로 확장하고 그 지대에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비상약 요오드화칼륨 알약과 함께 위험지대에 살고 있음을 알리는 공식통지문을 보냈다고 한다. 사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원전을 계속 안전하다고 우기는 한국과는 참으로 대비되는 모습이다.
217쪽
새로운 기술 발전은 새로운 일거리들을 창출하는 것이며 사실 잘 활용한다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실업자를 대량으로 쏟아내는 상황이 들이닥치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면서 "제발 나를 안정적으로 착취해달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불안에 떨지 않고 새로운 직장을 만들어가게 할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218쪽
이른바 '4차 산업혁명기'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 실업자'라는 불안한 상태를 감내해야 한다. 운 좋게 안정된 직장을 가진 이들도 긴 '타율노동'의 시간을 견디느라 탈진 상태라고들 한다. 이제 그 쳇바퀴에서 벗어나 자율노동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다.
219쪽
중요한 것은 세대를 이어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아내야 하는 것인데 나는 그 답이 걸어서 이동 가능한 규모의 지역적 삶의 회복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 그 대안이 바로 지역이고, 지역에 기반을 둔 다양한 사회경제 활동이며 일상적 삶에 기반을 둔 공론의 정치일 것이라는 말이다.
226쪽
역사적으로 보면 억압적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세대는 패배주의와 생존주의를 내면화한 세대다. 반면 해방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빈곤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성공주의 세대다. 가난에서 벗어났고 점점 나아지는 시대를 경험하면서 선진국을 따라잡았다. 그래서 이들 개발독재 시대의 주인공들은 "하면 된다"는 믿음을 내면화하고 있다. 노후에는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서 더욱 돈 관리에 관심을 쏟으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한편 그 아래 세대인 이른바 '386'세대는 어떤가? 1970~80년 학번으로 젊을 때 반독재 투쟁에 열을 올린 386세대는 경제성장만을 외치며 군부독재에 동조한 선배 세대를 경멸하지만, 가치와 태도 면에서 그들과 비슷한 데가 많다. 문제가 생기면 모든 연줄과 자원을 동원해서 조직화하고 "하면 된다", "뭉치면 산다"는 태도 면에서 그러하다. 이 두 세대에게 무찔러야 할 적이 분명했고 그래서 이들은 적과 대결하기 위해, 목표 달성을 위해 뭉쳤다. 그럴 때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전쟁 중'에 질문을 한다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행태는 허용할 수 없었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고 공유보다는 독점/독재에 익숙하다. 이는 크게는 국민국가 형성을 스스로의 손으로 하지 못한 한국의 근대 정치사, 그리고 경제생산 중심의 개발독재적 불균형 발전의 산물이다.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 생존 내지 출세의 단위가 되어 굴러간 사회였으므로 개인성은 억압되었다. 현대 한국 사회가 정치적 민주화에 비해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사회가 되어가는 이유도 가족주의 때문이다(수저계급론). ...... 시민의 시대를 열어가겠다면 각자가 선 자리에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하면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우선 의견을 가진 시민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조율해가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 충분히 질문을 하고 실험을 하면서 최선의 방안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228쪽
나는 전환을 하려면 특히 90년대 학번들과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숨어들거나 의기소침해져 있는 중이다. 나는 이들 신세대가 활약을 시작할 때, 그리고 이들이 위 세대인 386세대와 아래 세대인 밀레니얼 세대와 제대로 접속해서 창의적 공유지대를 만들어낼 때 본격적인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231쪽
실제로 앞으로 10년, 지구상의 식량 생산량은 전 인구를 먹이고도 남을 양이다. 그래서 기본소득 주창자인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 교수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물고기를 주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이미 충분히 물고기가 잡히는 테크놀로지라면 물고기 잡는 법을 왜 또 가르치겠는가? 물고기를 잘 먹도록 기본소득을 보장해줌으로 앞으로 풀어야 할 다른 문제를 풀고 지금의 고기잡이가 잘 안 될 때를 대비한 생산을 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방향이다. 이런 당연한 답을 두고도 제대로 분배할 생각은 않고 끊임없이 모든 사람, 특히 청년들을 생존의 불안에 시달리게 하는 이 체제는 누구를 위한 체제일까?
246쪽
하늘과 바람과 물과 흙을 포함한 공유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지구를 망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세금을 매기고 지구를 살릴 시간을 벌기 위한 시민배당을 청구할 것이다.
275쪽
그동안 국민들은 국가권력에 너무 많은 것을 위임했다. '공공' 내지 '공공성'을 국가와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원래 '공공'은 시민(국민)이 만드는 것이다. ...... 직접민주주의, 풀뿌리민주주의, 조합주의 등의 논의가 시작될 때다.
276쪽
자유의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가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자유, 내 삶이 제대로 살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적 자유'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사회주의 재발명: 왜 다시 사회주의인가>에서 초기 사회주의자가 주장한 '연대', '연합', '코뮌'을 '사회적 자유'라고 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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