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콤비 - 자의의 진가 - 희생 금지령

 

결혼하고 몇 달 후 남편은 라식 수술을 받았다. 내 요구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평소에도 안경 쓴 남자를 별로 안 좋아했다. 학구적이거나 전문가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영 별로다. 또 벗겨 보니 놈의 얼굴이 더 예뻤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사실이다. 완전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그나 나나 둘 다 불편했다. 안경 없인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나빠서, 특히 잠자리에서 어지간히 거슬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안경을 써 온 그는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낀다고 했지만, 나는 안경을 꼭 벗기고 싶었다. 결국 당사자인 그가 아닌 내 바람으로 라식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나는 안경 벗은 그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도 거의 20년 만에 시력을 되찾아서 좋았다. 300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긴 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는 그 이상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잘한 일이고, 또 감사한 일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받을 만큼 라식이 일반화됐다는 것, 부작용 없이 수술을 마쳤다는 것, 그리고 그 비용을 감당할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는 것, 전부 타이밍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그는 날로 예뻐졌고, 우리의 관계도 갈수록 끈끈해졌다.

 

라식은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받는 수술이다. 아프거나 다쳐서 받는 수술과는 다르다. 만약 당시 그가 원해서 수술을 결정했다면 마음이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편리를 위해 큰 돈을 썼다는 생각에 틈만 나면 생색을 내기 바빴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거의 수술을 시키다시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난 내 요구를 들어준 그가 고맙다. 라식의 부작용이 겁나서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 보통은 상대의 시력이 좋아졌단 이유로, 그를 위해 한 일인 양 생각 없이 말을 내뱉곤 한다. 본인이 좋아서 내린 결정이면서도 상대를 위해 희생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 착각은 생색 또는 유세로 이어진다. 연인이나 부부간에는 '생색'을 조심해야 한다. 설령 그 사람을 위해 했더라도 반복해서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고마운 줄 안다. 거듭 얘기할 때마다 오히려 고마움은 치사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버린다. 좋은 일 해 놓고도 욕먹기 십상이다. 커플 간의 생색은 싸움을 일으키는 흔한 요인 중 하나다.

 

부부간의 희생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인 간에도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은 반대다. 희생은 생각처럼 그리 숭고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 희생 자체는 훌륭하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희생자의 보상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걸 말로 표현하면 생색이 되고,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으면 보상 심리가 된다. 생색은 본인이 자제할 수 있지만,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심리는 자동적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지우려 해도 지울 수가 없다. 상대로부터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얻어 내거나 상대도 자기만큼 희생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많은 걸 희생할수록 상대에게 가지는 기대, 요구하는 희생이 커질 수밖에 없다.

 

희생에 따르는 보상 심리가 서로의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는 드라마에도 흔히 쓰이는 이야기다. 80년대 시골. 찢어지게 가난한 부부가 있다. 자식 농사만큼은 풍년이다. 자그마치 오남매다. 부부는 못 먹고 못 배운 한을 장남에게 푼다. 둘째 아래로는 부부의 희생에 동참해야 한다. 장남은 법대, 나머지는 중졸, 잘해야 고졸이다.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하고 장남의 학비를 모으는 데 힘을 보탠다. 온 가족이 장남 하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장남은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가 된다. 잘나가는 집안의 딸을 소개 받는다. 그 수준에 맞추려니 가랑이가 찢어진다. 부모와 동생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 시간도 없다. 방문도, 연락도 뜸해진다. 밥상 앞에 앉아 동생들이 불만을 늘어놓는다. '누구 덕에 대학 갔는데'로 시작해 한두 마디씩 거들며 툴툴댄다. 서운하기로 치면 부부가 더 하지만, 애써 장남을 두둔하며 자식들의 입을 막는다.

 

동생들은 억지로 강요 받은 희생이니 당연히 억울하고 괘씸할 것이다. 부부는 다르다. 자식이 출세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뒷바라지했던 게 아니다. 본인의 무지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스스로 희생을 자처했다. 장남이 잘돼야 집안이 잘된다는 생각에 그가 잘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도 서운하긴 마찬가지다. 큰일 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바쁘고 피곤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좀 더 자주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그간의 고생에 대한 감사 인사도 듣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장남은 자신이야말로 부모를 위해, 동생들을 대신해서, 희생하고 봉사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법대 진학은 부모의 바람이었다. 집안의 기둥이란 말은 백 번도 더 들었다. 기둥이어서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부모의 기대는 늘 부담스럽고 답답한 것이었다. 좋은 것, 맛있는 것은 전부 본인 차지. 그것도 부모의 뜻이었다. 동생들의 희생을 요구한 적도 없다. 휴학도 가능했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반대하고 나선 건 부모였다.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법대에 가고 검사가 됐다. 이제야 부모가 내건 미션을 끝마친 셈이다. 장남은 부모를 포함한 가족의 희생에 보답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가 강요한 희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좋든 싫든 무조건 따랐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원하는 걸 선택하고 누리며 살리라 마음 먹는다.

 

희생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비할 데 없다는 부모의 내리사랑도 희생 뒤에는 보상 심리가 따른다. 연인이나 부부간에는 말할 것도 없다. 희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면 하루빨리 그 일을 접는 게 상책이다. 위의 부모처럼 상대의 의견과 상관없이, 본인 기준에서 희생이라 여기고 감수하는 희생은 최악의 희생이다. 상대는 그게 희생인 줄도 모른다. 거기다 대고 보상을 요구하면 적반하장이란 소리만 듣는다. 사실 이건 희생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자기 욕심 채우기일 뿐이다. 희생이라고 착각할 뿐이다.

 

장남의 희생은 부모가 요구한 희생이었다. 그가 보답은 커녕 자기 마음대로 살 생각에 빠져 있는 건, 그 정도는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희생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가 요구한 희생이든 본인이 자처한 희생이든 보상을 기대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필요한 건 희생이 아니라 자의(自意). 본인의 행동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도록 판단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보상도 바라지 않을 뿐더러, 생색내는 꼴을 안 봐도 된다. 자기가 원해서 한 일에 생색을 내는 사람은 없다. 희생을 강요 받은 동생들과 부모는 분명히 입장이 다르다. 본인의 희생이나 공을 밤낮 들추며 대놓고 보상을 요구하는 건 희생을 강요 받은 쪽이다. 만약 장남이 동생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들볶였을 게 분명하다.

 

결론은 간단하다. 희생은 하지도, 바라지도 말라는 것. 희생 축에도 못 끼는 작은 부탁도 남발해서 좋을 건 없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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